갈 데까지 간 권력의 몰염치
갈 데까지 간 권력의 몰염치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9.16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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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영창 갈 짓을 영창을 지키는 우리가 하고 있다.” 김보통의 만화 `D·P'에서 주인공이 한 말이다. 그는 헌병이고, 군복무를 절반 정도 마친 상병이다. 헌병 중에서도 탈영병을 추적해 붙잡는 `근무이탈체포전담조' 소속이다. 탈영병이 생기면 사복 차림으로 영외로 나가 활동한다. 사병에게 그런 보직이 있다는 사실을 이 만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그가 체포한 탈영병의 태반은 구타, 고문, 모욕, 성추행 등 상급자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부대 담을 넘은 병사들이다. 그러나 그가 속한 헌병부대 역시 고참이 신참을 학대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가 행사되는 현장이, 명색이 헌병인 그들이 관리하는 영창 바로 옆이다. 그런 폭력을 피해 달아난 병사들을 잡으러 다니는 모순적 현실에 쓰디쓴 자조를 담아 주인공이 후배 병사에게 내뱉은 말이다.

부당한 이권을 위해 자신에게 부여된 공적인 책무를 부정하고 망각하는 행위가 군대에서만 벌어질 리 없다. 지난 4년간 범죄를 저지른 국가 공무원이 1만2000명에 달한다는 경찰청 집계가 최근 공개됐다. 어느 부처가 가장 많았을까. 경찰청 소속이 5610명으로 압도적이었고, 법무부가 936명으로 뒤를 이었다.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전체 공무원 범죄의 절반을 차지했다.

재벌이 검찰보다 더 무서워한다는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과 불공정 거래를 하다 전·현직 간부 12명이 기소되는 망신을 당했다. 공정위는 지난 6년간 16개 기업에 압력을 넣어 퇴직 간부 17명을 재취업시켰다.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힌다. `퇴직간부 재취업 계획안'까지 만들어 공개적이고 조직적으로 기업에 특채를 요구했다. 고시 출신은 2억5000만원, 비고시 출신은 1억5000만원으로 연봉을 책정해 제시하고 그대로 관철했다. 퇴직 전에는 교육이나 파견을 나가는 꼼수도 발휘했다. 퇴직 전 5년간 취급한 업무와 관련된 기업에는 재취업할 수 없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서다. 재취업 후 억대 연봉에 월 수백만원의 업무추진비와 차량까지 지원받은 그들이 무슨 일을 했을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기업과 로펌에 재취업한 간부들은 이미 퇴직한 공정위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후배들을 접촉했다. 불공정 행위가 적발된 대기업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친다는 비판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가 명확해지는 지점이다.

이제는 이 부끄러운 대열에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는 법원까지 가세하고 있다. 청와대와의 `재판거래'가 의심돼 검찰 수사를 받는 대법원은 증거인멸에 공무집행(수사) 방해 혐의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법원의 압수수색영장이 줄줄이 기각하는 사이에 물증은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데도 수사 협조를 공언했던 대법원장은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말만 공허하게 되뇌이고 있다. 퇴직하며 기밀문건을 무더기로 들고나온 전 대법원 고위간부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 문건 대부분을 폐기했다. 문건의 소재를 파악한 검찰에 “파기하지 않겠다”며 써 낸 서약서도 무시했다. 법원은 검찰이 청구한 압수영장 기각으로 그에게 증거를 없앨 시간을 벌어줬다.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할 기관이 조직적이고 노골적으로 법을 농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적 공분이 일고 있는데도 이들에게서 부끄러움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정위에서는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인데 왜 우리만 잡느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고 한다. 대법원에서도 의혹에 관련된 누구 하나 지금까지 국민에게 사과는커녕 유감을 표한 적도 없다. “영창 갈 짓을 영창을 지키는 우리가 하고 있다”고 자책한 만화의 주인공만도 못한 엘리트들이 지금 국가의 요로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우선 정부가 할 일은 공정위 직원들의 불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참에 금융위, 금감원, 국세청 등 다른 권력기관으로 재취업자 전수조사를 확대해 기업과의 부당한 유착을 발본해야 한다. 지지부진한 사법농단 수사에 대해서도 특별재판부 구성이 어렵다면 국회가 나서 국정조사를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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