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야호 무문평창
백장야호 무문평창
  • 무각 괴산 청운사 주지
  • 승인 2018.09.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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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무각 괴산 청운사 주지
무각 괴산 청운사 주지

 

반갑습니다. `무문관(無門關)'공안으로 보는 자유로운 선의 세계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는 괴산 청천면 지경리 청운사 여여선원 무각입니다. 맑게 갠 하늘을 보니 문득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고 싶은 계절입니다. 이 시간에는 무문관 제 2칙 백장야호(百丈野狐)에서 무문선사의 평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문 선사는 이에 대해 평창으로 설하시기를 `불락인과'는 어째서 야호로 떨어지는 결과가 되었고 `불매인과'는 어째서 야호를 벗어나게 하였는가? 만약 이것을 외눈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앞의 백장 노인이 오백생을 풍류를 즐겼음을 알게 되리라고 하였는데요.

백장선사와 전 백장(여우)이 말한 인과란 삼세인과(三世因果), 즉 우리들이 금생에 가지고 있는 상태는 전생에서 행한 업인(業因)에 의한 결과(果)이며 금생에 짓는 바는 내생에 인(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전 백장(여우)은 “공부를 많이 해서 도를 닦은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 때문에 오백생동안 여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 백장(여우)이 눈물을 흘리며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데요. 이 까닭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선(禪)이라는 것이지요.

여우의 몸이 되었을 때는 어떻고 여우를 벗어났을 때는 어떠한가요? 만약 여우가 여우의 몸을 벗어났다면 무엇이 될 것인가요? 개가 될 것인가? 말이 될 것인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에 만족 못하면 그때가 여우이고 만족할 때야말로 만족 못하는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물에 열중하여 그 사물과 한 몸이 되어 딴 마음을 갖지 않을 때에 비로소 완전한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불법이란 바로 이러한 자아를 배우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자아를 배운다는 것은 자아를 잊는다는 것이며 자아를 잊을 때 비로소 전 우주가 자아 아님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지요. 그래서 선의 요점은 일단 나를 무(無)로 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無와 한 몸이 될 때 도처위주(到處爲主)로서 천하를 주름잡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인과에 매(昧)하지 않는다”는 이 두 가지 언어는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인데요. 선(禪)이란 문자나 언구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 것이며 또한 그 자체로 얽매이게 되면 부자유스러워 져버리는 것입니다. 말에 얽매어 어느 쪽 말이 정말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며 이는 결국 우리 자신이 주인공으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 중심점이란 바로 무자(無字)가 되는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도 무문관 제 2칙 백장야호를 계속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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