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걷다
여름을 걷다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8.09.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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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팔을 쭉 펴면 하얀 솜뭉치 같은 구름을 잡을 것 같다. 이렇게 구름이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는 걸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백 년인지 백 십 년만인지 찾아온 더위 손님, 기록적인 폭염 때문에 올해는 산행을 아예 접고 있었다. 도심은 불바다였다. 서 있는 것조차도 어려울 지경이다.

푸른빛 하늘이 우거진 나무로 가려진 대전 계족산 황톳길, 망중한 시간 맨발로 걸어 볼 요량으로 찾았다. 흙을 밟기가 어려운 요즘, 콘크리트 바닥과 아스콘으로 꽁꽁 가려진 길바닥들, 계족산 임도에는 10리도 못 가 발병이 난다고 했는데 30리 이상을 황토 흙을 깔아 힐링 할 수 있는 황톳길이다.

진흙 논바닥을 걷는 느낌 그대로의 황톳길, 찬바람이 이는 겨울날 타일바닥을 맨발을 밟았을 때 발끝에서 전해오는 알싸한 찬기가 온몸을 휘감고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처럼, 황토 진흙에 첫발을 내딛으면 차가운 기운으로 온몸의 살갗이 오그라들고 솜털이 일어나며 소름이 돋고 더위가 금시 사라진다. 화전밭둑처럼 구불구불한 황톳길, 얼핏 보였다 사라지는 산모롱이를 지나 양손에 신발을 들고 가슴에 일렁이는 추억을 안고 상념에 젖어들어 자박자박 생각 끝까지 가본다.

학창시절, 비포장도로에 버스 한 대만 지나가도 손사래를 치면 뿌연 먼지를 막으려 입을 양손으로 가린 체 숨도 제대로 쉬지 않던 비포장도로. 이제 그런 곳은 가끔 영화 속에서 등장할 뿐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황톳길은 추억을 되찾은 보물이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움푹 팬 웅덩이마다 물이 고여 자동차라도 지나가면 소리 지르며 도망치곤 했다. 그런데 강산이 몇 번 바뀐 나이가 되면서 외려 흙집을 찾고 비탈진 산길을 찾게 되는 건 향수 때문일까.

질척하고 뻘건 황토 흙, 발바닥을 간질이며 미끄러지도록 미끈한 감촉, 연신 발가락 사이로 방앗간의 가래떡처럼 쏙 올라오는 진흙, 걸음걸음마다 유년시절을 돌이켜보며 발 도장을 꾹 찍었다. 폭염을 이기지 못해 바싹 마른 황토는 마른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돌보다도 더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많은 사람이 디딘 탓에 요철모양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면, 발길이 닿은 곳마다 반들반들하고 매끈한 것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유약을 발라놓은 토분 같기도 하고, 쩍쩍 갈라진 표면은 어슷어슷한 사선 같으면서 투박한 거친 표면은 마치 빗살무늬토기 같다.

인간이 흙,·물,·불,·공기 등 여러 가지 원료를 섞어 만들어낸 인류역사 최초의 합성물이 토기 아니던가. 토기를 가만 들여다보면 어여쁘지도 않다. 가는 댓조각이나 싸리나무가지로 엮어 만든 통발과 흡사하다. 둥글넓적한 주둥이와 좁다란 아래쪽에 망을 달아 고기를 안에 가두는 통발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모양이다. 논두렁의 물꼬에 통발을 설치하여 민물고기를 잡는 소박한 서민들이 주로 사용한 토기, 어쩜 선조들은 대나무 통발로 잡은 고기를 토기에 염장하거나 저장을 하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그날, 황톳길 끝자락 길섶에 주저앉아 바특한 흙으로 조물조물 반죽을 하여 막사발 하나를 만들었다. 흙 한 줌을 비벼 기다랗게 만들어 돌돌 말아 막사발굽도 만들고, 날렵하게 브이라인을 만들어 허리 부분을 강조하여 물레는 아니지만 넓적한 돌을 빙빙 돌려가며 빚었다. 투박하게 만들어진 막사발 하나, 돌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놓고 거센 파도에 실려 가지 않으려 더 세게 바위를 붙들고 있는 미역처럼 안간힘을 쓰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바닥에 힘을 주어 황톳길을 내려왔다. 여전히 따가운 볕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오후, 더위를 머리에 이고 무장무장 여름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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