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처럼 바람처럼
비처럼 바람처럼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8.08.2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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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비(雨)와 바람(風)을 좋아합니다. 아니 우풍(雨風)같이 살았습니다. 비 오면 비가 와서 좋았고, 바람 불면 바람 불어 좋았습니다.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피고 지는 꽃처럼 그렇게 비에 젖고 바람맞으며 살아왔습니다.

어릴 땐 비가 오면 무엇에 홀린 것 마냥 아버지가 모내기 때 신던 큰 장화를 신고 귀한 대접을 받던 비닐우산을 꺼내 들고 개울가로 가곤 했습니다. 소나기가 내릴 땐 개울물이 순식간에 불어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물살이 거세집니다. 어지럽고 힘에 부쳐 들고 있던 비닐우산을 놓치게 되고, 급류에 떠내려가는 우산을 주우려다 그만 신고 있던 장화마저 물살에 잃어버리곤 물에 빠진 생쥐모양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비싼 우산과 장화를 잃어버렸다고, 감기 든다고 나가지 말라 했는데 또 그랬다며 회초리를 치셨습니다. 빗물에 흠뻑 젖은 등짝엔 회초리자국이 붉게 나있었고 울다가 잠이 들면 영락없이 감기에 걸려 신열을 앓았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해놓고도 비가 오면 그리했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효도 한 번 변변히 못 하고 떠나보낸 어머님이 눈물 나게 그립구요.

그래요. 지금도 비와 관련된 노래를 자주 흥얼거리는 걸 보면 비는 제 심연의 샘이었습니다. 바람 부는 날은 연을 날리기도 하고 바람개비를 돌리며 놀았습니다. 그야말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죠.

미당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 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고 노래했습니다.

필자 역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건 바람이었다 고백합니다. 참으로 많은 바람을 맞으며 살았고 또 많은 바람을 피우며 살아왔습니다. 순풍과 미풍의 세월이 없진 않았지만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에 휘감기도 하고 거센 태풍에 휘청거리기도 하며 예까지 왔습니다. 돌아보니 질풍노도처럼 살았고, 예기치 않게 왔다가 정처 없이 사라지는 바람 앞에 목 놓아 울기도 하고 때론 신바람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오는 바람 막을 수 없었고, 가는 바람 잡을 수 없었습니다. 비와 바람은 손에 움켜쥐면 쥘수록 쉬 빠져나가더라고요. 아무튼, 비는 내립니다. 이슬비 보슬비 가랑비처럼 내리기도 하고 소나기 장대비처럼 내리기도 합니다. 여우비처럼 감질나게 내렸다가 장맛비처럼 몇 날 며칠을 내리기도 합니다. 타들어가는 대지에 갈증을 풀어주는 단비 같은 비가 있고, 대지를 한순간에 쓸어버리는 성난 폭우도 있더이다.

바람은 붑니다. 절기에 따라 적도 저압대에서 불어오는 무역풍이 불기도 하고, 아열대 고기압대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이 불기도 합니다. 또 강에는 강바람이, 산에는 산바람이, 바다에는 바닷바람이 붑니다. 대지에 온기를 불어넣는 바람이 있고, 대지를 한순간에 쑥밭으로 만들어버리는 태풍도 있더이다. 아무리 단비 같은 빗물이라도 고이면 썩습니다. 악취를 풍기기도 하고 뭇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람은 머물지 않아 썩지 않습니다. 늘 새 바람이지요. 하지만 바람 잘 못 들면 바람 든 무처럼 되고 마니 바람 잘 들어야 합니다. 비처럼 바람처럼 산 삶입니다. 하여 이제부터라도 더욱 촉촉한 단비로 따뜻한 바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대가 단비가 되면 내가 훈풍이 되고, 내가 단비가 되면 그대가 훈풍이 되어 살면 더욱 좋겠죠. 서로에게 단비가 되어주고 신바람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랑이기를 소망합니다.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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