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속 모래알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
신발 속 모래알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8.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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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걷다가 신발 속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꽤나 성가시다. 신발 깔창과 발바닥 사이를 제멋대로 휘저으며 쾌적한 걷기를 방해하는 모래알 때문에 몇 걸음 걷다가는 기어이 멈추어 탈탈 털고 나야 직성이 풀린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신발을 벗어 털어버릴 때 나오는 모래알은 아주 미미하다. 대부분이 채 1㎜에 못 미칠 경우가 많다. 어느 날 새벽 산책길에는 이질감을 주는 모래알이 발바닥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마사지를 해주는 기특한 만남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름 즐겨보려 했건만, 이물질이 끼어듦에 익숙하지 않은 감각은 몇 걸음 걷지 않아 결국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평온함의 세상에서 불편함을 예견하거나, 갑자기 다른 물질이 나타나 평화로움을 방해하는 일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크기가 신발 속으로 침투한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이거나, 갑작스럽게 갈 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산사태일지라도 당혹감과 불편함, 심지어 위협을 느낄 수 있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아버지 기일과 살아생전의 생신이 음력과 양력으로 교차되는 8월. 신발 속의 모래알보다도 내 감각을 자극하지 못하는 아버지 생각은 아버지가 된 아들의 기억에 영영 다다를 수 없다.

어쩌다 이 땅의 아버지들은 한결같이 살아 있는 동안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는가. 자꾸만 희미해지고 생각마저 점차 사라지는 사이,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흔적 없는 무덤에서 아버지를 추억하는 건 부질없다.

나도 그럴 것이다. 고난이 닥칠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망설임 없이 일을 저지르거나 먼저 손을 들면서 나는 가족을 얼마나 외면했으며, 또 동료들을 얼마나 괴롭혔는가. 항상 높은 곳에 앉아 자식들을 배려한다는 명분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모순된 권위와 하얗게 지새우는 밤들의 연속에 파김치가 되어버린 아내에게 따듯한 위로의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비겁함. 그리고, 죽어서야 나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라고 자책하며 스스로 키워가는 쓸쓸함 뒤에 숨어, 나는 주변 사람을 또 얼마나 학대하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죽어서라도 사랑받을 수 있는, 그리하여 한 때 세상에 존재는 하고 있었다는 기억을 부둥켜안고 남아 있기를 바라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는 내 아버지와 닮아가고 있다.

8월이 다 가고 있다. 숨조차 쉬기 힘들다며 폭염을 원망하던 날들은, 늘 그렇듯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체념에 가까운 달관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어느 사이 뚝 떨어진 기온과 태풍 끝에 매달려온 가을장마에 호들갑이다. 그렇게 지나는 8월을 부여잡고 나는 차~암 기억에 인색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109년전 오늘(8월 29일). 을사늑약(1905년)과 1907년 군대가 해산되는 강제협약을 통해 나라를 빼앗겼던 국치일에 대한 기억은 벌써 의미가 없고, 39년 전 8월 27일에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함부로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사이,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폭도로 몰아 숨지게 하고 회고록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겼던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리고 있다며 기억을 지우려 하고 있다.

개인에게 있어서 역사는 신발 속 모래알갱이만도 못한 것인가.

깊은 밤 혼자 깨어나 시대의 서러움에 떨며 속울음을 삼키더라도 아침이면 다시 자애로운 모습으로 가족들을 안심시켜야 했던 아버지. 먼저 낮은 곳에 자리 잡고, 먼저 수저를 들더라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남겨두는 것으로 오히려 권위를 잃지 않으려 했던 이 땅의 아버지.

8월은 두려운 일도 주저함 없이 먼저 나서며 스스로 질긴 울타리가 되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이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될 수 있는 세월로 길이 남아 있기를.

「내가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이성복의 시. 서해 中>처럼 문득 바다가 보고 싶은, 얼마 남지 않은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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