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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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08.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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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한강. 서울의 한강(漢江)이 아니라, 여자 이름 한강(韓江)이다. 맨 부커 상을 받아 유명해진 작가 한강이다.

주말에 국제학회에 갔는데 교수의 부인이 대만에서 출판사를 하고 있었다. 교수의 말로는 한강 것을 도맡아 번역했단다. 그러면서 `채식주의자'를 번역했다고 해서, 나는 `소년이 온다'도 번역했느냐고 물었는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인터넷에서 찾아보더니 둘 다 모두 번역되었다면서 책 소개를 보여주었다.

한강 것 그냥 읽기 쉽지 않다. 그의 문체가 시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번역은 어떨까?

나는 책을 서점에서 후딱 읽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오랜만에 `삼포로 가는 길'을 보고 싶어 서점에서 30분 만에 보았다. 동명 영화를 지나치듯 본 여흥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기억조차 아득하지만 옛날에 읽은 기분을 되찾고 싶어서였다. 거꾸로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는 영화가 좋아 원작을 찾아 읽었다. 짧은 소설을 오히려 길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영화기술이 좋아 소설보다도 좋을 수 있다. 보통은 화면이 상상을 못 따라가기 때문에 책이 영화보다 낫다는 평가를 하지만 말이다. 화면은 한 장면이지만 상상은 수백, 수천의 장면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백세노인'은 영화가 소설의 절반만 담았다. 거듭되는 에피소드라서 영화로 담으면 지루할까 그랬는지, 에피소드를 다 담다가는 너무 길어질까 그랬는지, 상영이 성공하면 2탄을 만들려고 그랬는지, 어쨌든 딱 절반이다. 노인 분장술이 좋다 했는데, 한국전 피난민의 애환을 담은 `국제시장'의 주인공이 늙어가는 장면을 바로 그 스웨덴 영화팀이 담당한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소설은 서점에서 읽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아 사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그다지 분량이 많지 않았는데도 사서 봐야 하는 소설이었다. 소도시의 시외터미널에서 웬일인지 `채식주의자'가 가판대에 있길래 시간가량 버스를 기다리면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이건 실패했다. 쉽게 읽히지도 않고, 표현도 특이하고, 구조도 연결되어 있었다. 옴니버스 스토리처럼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세 화자의 구성이니 말이다.

`소년이 온다'도 형식은 `채식주의자'와 같았다. 어찌 보면 증언들이었다. 광주의 비극을 놓고 당사자인 중3 학생, 그와 함께 있었던 여고생, 소년의 어머니, 형으로 불렸던 시민군들의 눈으로 이야기를 모았다. 소년에게는 `그' 또는 `나'가 아닌 `너'라는 보기 드문 2인칭 시점을 적용해서 그의 미성년을 강조했다.

나는 한강 같은 시적인 작가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다룰까 하는 궁금증에 `소년이 온다'를 보았다. 어떻게 보면 시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조금은 거리를 두고 광주를 접근했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느껴졌다. `매우 아프다'고 하면 진단이지만 `손가락에 끼워진 모나미 검정 볼펜'이라고 하면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한승원의 불교적인 분위기를 그녀가 시적인 면으로 잘 이어나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름조차.

`채식주의자'는 잘 안 나가다가 수상 이후 대만에서 8천부 정도 팔렸단다. 출판자의 안목이 놀라웠다. 수상 이전에 번역을 했다니 말이다. `소년이 온다'(少年來了)의 제1장은 `동호의 이야기'(東浩的故事)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것이 원제라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라고. 왜? 역사는 개별적이지만 시는 보편적이기에.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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