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을 찾아가는 여행
보물을 찾아가는 여행
  • 박재명 충북도 동물방역과장
  • 승인 2018.08.22 1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박재명 충북도 동물방역과장
박재명 충북도 동물방역과장

 

충북에 산재한 국보는 12점, 보물은 94점. 오늘은 보물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빈 콜라병엔 빈 콜라가 있고, 빈 통장에 사라지지 않는 0원이 있다고 한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려, 빈 절터에 있을 빈 사찰을 찾아 나섰다. 국보급 문화재가 여러 점 있는 충주 청룡사지를 향했다.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있다. 지금은 5종류의 유물을 남기고 오랜 시간을 침묵하고 있다. 청룡사터 옆 숲길로 접어들면 청룡사 위전비(位田碑, 충북유형문화재 제242호)를 먼저 만날 볼 수 있다. 청룡사를 중건하고, 운영에 필요한 재물을 기증받은 내역을 새긴 비석인데, 청룡사의 중건역사와 사원경제를 살펴볼 수 있다.

두 번째 유물은 석종형(石鐘形) 승탑(부도, 충북문화재자료 제54호)이다. 어느 스님의 승탑인지 모르지만 탑신에 새겨진 희미한 글자로 보아 `고운당사리탑'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유물은 보각국사정혜원융탑(국보 제197호)과 사자 석등(보물 제656호)과 보각국사탑비(보물 제658호)이다. 보각국사정혜원융탑은 멀리서 보아도 섬세하고 화려하다. 석종형 승탑(부도)과 달리 8각원당형으로 만들어졌다. 신라와 고려 초기의 승탑은 8각원당형, 고려 말 이후는 석종형이 주를 이룬다. 정혜원융탑이 고려 말에 만들어졌음에도 8각원당형임은 고려의 전통성을 계승한 초기조선 석조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승탑을 가까이 보니 조각들이 화려하다. 연화문양의 기단부 위에 세운 탑신이 배흘림형인 것도 특이한데, 8면에 신장(神將)을 섬세하게 양각하였고 각 면의 모서리를 감고 있는 용들이 하나같이 살아 꿈틀거리듯 승탑을 호위하고 있다. 탑신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은 기와형이지만 기왓골이 없는데 신라의 승탑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 특히 상륜부에 태극 문양으로 새긴 보주를 얹었는데 이 또한 독특하다.

국내 유명한 승려들의 승탑은 많지만 국보로 지정된 승탑은 흔치 않다. 보각국사정혜원융탑은 국보다. 그 연유는 예술적으로 아름답고 독창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승탑건립 관계자, 설립경위 등에 대한 문헌적 기록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사자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석등이다. 한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으며, 평면의 4각형 석등은 조선시대의 양식이지만, 두툼한 방석모양의 지붕은 고려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한다. 전체적으로 8각 기와모양의 지붕을 갖춘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비교하면 통일신라 시대의 양식과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각국사의 덕과 지혜를 추앙하고 기리기 위해 태조의 명을 받아 양촌 권근선생이 비문을 지어 세웠다는 보각국사탑비가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풍화에 비(碑)의 표면이 부식되어 떨어져 나가 참으로 안타깝다.

보각국사는 누구인가? 보각국사가 일연스님이냐고 물으니, 해설사는 웃으며 동명이인이라고 한다. 군위 인각사에 보각국사정조지탑이라는 일연스님의 승탑이 있으나, 충주의 보각국사는 혼수 스님이란다. 고려의 우왕과 공양왕 그리고 조선 태조의 국사(國師)를 지낸 스님은 1392년(태조2년) 73세로 입적했다. 태조는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왕명으로 승탑을 만들어 `보각국사정혜원융탑'이라고 명명했다.

청룡사는 이제 흔적만 남았다. 청계산에 기대어 향로봉을 바라보는 절터는 석축의 흔적과 우거진 잡초 속에 기와편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청룡사가 생기고 떠나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을 만한 아름드리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절터를 지키고 있다. 잡초로 가득 찬 절터에서 빈 대웅전의 빈 뜨락에 앉아 사찰의 고요한 냄새를 맡아 본다. 대웅전과 마주 보는 청계산과 단청 처마 사이에 구름이 흐르고, 바람 한 줄기가 풍경에 걸려 흔들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