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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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 승인 2018.08.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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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집을 떠나면 다 고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배낭 하나를 메고 훌쩍 떠나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이 또 있을까. 사실 여행이 주는 쏠쏠하고도 쫀득한 재미는 고생스런 길 가운데에 있다. 높은 산을 오르내리는 트레킹 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라는 의문을 던질 때가 많다. 하지만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생각이 달라진다. 힘들었던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아름답게 채색되는 것을 느낀다. 그 반전의 맛에 여행은 중독성을 띠게 되고, 고생을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사게 되고, 인생길에 비유되기도 한다.

더위가 시작되자 작년부터 준비해 온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나라로 트레킹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사에서 보내준 안내서를 보면서 꼼꼼하게 짐을 꾸렸다. 그곳 역시 뜨거운 여름이라 얇은 옷과 챙 넓은 모자를 챙기고 고산지대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고려해 두꺼운 옷과 우의 등 옷가지만 해도 벌써 가방이 그득하였다. 필요한 등산용품과 간식거리를 좀 넣고 보니 어깨에 메고 갈 등산용 배낭도 꽉 찼다. 마지막엔 편하게 신고 다닐 슬리퍼를 넣을까 말까 잠깐 고민을 하였다. 결국, 조금이라도 짐을 덜고 간편하게 가자고 결론지었다. 어차피 고생을 하러 가는데 얼마간의 불편쯤이야 추억거리가 되리라는 자신감마저 생겼다.

공항에 같이 갈 열여덟 명의 동행이 모였다. 그중 다섯 명은 예전부터 같이 여행을 하던 친구들이었다. 서로 짐을 비교해보니 나의 짐 꾸리기가 약간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친구 중 한 명은 큰 짐을 먼저 보내고 벌써 간편한 어깨가방에다 반바지, 슬리퍼 차림이었다. 반면에 나는 여행 가방을 부쳤지만, 아직도 무겁고 큰 배낭에 등산화, 긴 옷차림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보안검색을 거쳐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행기간 내내 나는 무겁고 불편한 차림의 곰이었고, 그 친구는 날렵하고 우아한 사슴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같은 여행안내서와 짐 꾸리기 목록을 받았는데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겼을까?

상상력의 차이였다. 어차피 각자 갖고 갈 수 있는 짐의 크기와 무게는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 고산 트레킹 여행에서는 필수적으로 가지고 가야 할 품목이 많아 여유로운 공간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가방을 꾸리느냐에 따라 작은 여유 공간에서 큰 차이를 만들었다. 그 선택의 출발은 닥쳐올 현지 상황에 대한 상상력이었다. 나는 주어진 안내서대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고, 친구는 인터넷을 통한 자료와 과거 경험을 동원하여 현실에 가까운 상상과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 친구의 가방 속에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것을 예상한 몇 가지 밑반찬도 있었다. 조그맣게 분리하여 비닐 진공포장을 한 김치볶음은 식사 때마다 최고의 인기였다. 또 다른 친구는 고산병 증세를 덜어주는 약을 갖고 와서 나를 고통에서 건져주기도 하였다.

우리의 삶은 늘 꿈과 함께 내일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습관처럼 살고 있지만, 내일은 무언가 달라질 것을 기대한다. 그 변화의 기대가 현실이 되려면 여행 짐을 꾸리듯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렸다. 준비된 가방에 꼭 필요한 물품이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물품이 담길 것인지는 앞을 내다보는 상상력이 결정한다. 때로는 현재의 삶에 지쳐 내일을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일 년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지만 막상 출발일자가 눈앞에 다가오자 허둥지둥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이나 건강상의 위험에 대비한 준비만이라도 해 두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이변에도 삶이 무너져 내리거나 의외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폭염이 삶을 장악해버린 올여름엔 일찌감치 거실의 낡은 냉방기를 미리 바꾸거나 제대로 고쳐두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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