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
본다는 것
  •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8.08.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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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저기 한 여인이 있다. 나는 저기에 있는 여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보는 것은 저기 있는 여인이 아니다. 내가 보는 것은 그 여인에게서 반사된 빛일 뿐이다. 그 반사된 빛이 여인은 아니다. 조명이 달라지면 여인에게서 반사된 빛도 달라진다. 여인의 모습도 달라진다. 조금 전에는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고 여인이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여인에게서 반사되는 빛이 달라졌을 뿐이다. 조명이 없어지면 여인은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여인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여인을 만져 본다고 해서 정말로 여인을 만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여인의 피부가 내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을 느낄 뿐이다. 그 촉감이 여인은 아니다. 보는 대상인 그 여인의 상태에 따라서, 보는 주체인 자기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촉감도 달라진다. 어떤 때는 감미롭고 어떤 때는 징그럽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 전해지는 촉감이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저기 있는 한 여인을 진정으로 볼 수 있을까? 필자가 공부하던 미국 대학의 교정에는 이상한 조각 작품이 하나 있었다. 상당히 특이한 기하학적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서 작품의 모양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어떤 방향에서는 둥근 원형인데 어떤 방향에서는 사각형 모양, 삼각형 모양으로 보였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도대체 저 조각의 모양은 무엇일까? 사각형일까, 삼각형일까?” 이런 생각을 해 본 기억이 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조각에게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할까? 조각이 말을 할 수 없으니 망정이지 말을 한다면 아마도 웃기는 질문을 한다고 할 것이다.

과학은 관찰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과학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은 관찰이 믿을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말 관찰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관찰은 오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오감을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착시, 환청, 환각 등 오감이 믿을 수 없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없는 아기를 임신하는 상상임신이나 잃어버린 팔과 다리가 아픈 상상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오감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관찰 결과는 언어로 표현된다. 언어는 인간의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념은 인간의 사고가 만들어낸 가공물이다.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장치일 뿐이다.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면 관념 또한 믿을 수 없고, 관념인 언어도 믿을 것이 못 된다.

과학은 관찰을 기반으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과학에서 하는 관찰이 오감을 통한 관찰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오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학에서는 오감이 아닌 다른 관찰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찰을 정량화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정량화를 위해서 소위 자를 사용한다. 자라고 해서 길이를 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온도를 측정하는 온도계도 온도를 재는 자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자고, 체중계는 무게를 측정하는 자다.

이와 같이 관찰을 계량화함으로써 관찰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관찰의 객관성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사물을 진실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키, 몸무게, 체온, 등등을 관찰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 안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닌 물체도 마찬가지다. 그 물체의 질량, 모양, 색깔, 온도, 재질 등을 다 안다고 해서 그 물체를 다 안 것은 아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이 우주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관찰하는 범위 내에서만 사물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관찰이 그 사물에 대한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라고. 과학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없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우주가 유한이라면 보이지 않는 우주는 무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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