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필요한가
하얀 거짓말 필요한가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8.08.1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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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우연히 주말 드라마 <같이 살래요>를 시청하다 등장인물 중 연다연(박세완)이 남자친구 박재형(여회현)에게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자신을 좋아하는 최문식(김권)에게 현재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을까봐 말하지 못했다는 대화 내용이다. 그러한 감정 속임의 결과는 애초 선한 의도와 달리 그들을 둘러싼 인물 간의 큰 갈등으로 고조됐다.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할 때가 많다. 혹자는 감정의 자잘한 것까지 치면 개인이 총 하루 사용하는 거짓말은 200여 정도 된다고 한다. 선의 거짓말 또는 하얀 거짓말이 사회적 윤활유 역할을 하며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동력이라는 이유로 권장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런데 하얀 거짓말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한 빨간 거짓말과 달리 상황을 좋게 하려는 선한 의도이니 꼭 필요하다는 중론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주인공 장발장이 성당의 은그릇을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혀 심문받을 때 밀리에르 주교는 자신이 선물로 준 것이라며 오히려 은촛대까지 건네는 자비를 베푼다. 밀리에르 주교의 하얀 거짓말이 장발장을 구한 것이다.

모 기관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평소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조사했을 때 첫째,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둘째, 단순한 재미를 위해서 셋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넷째, 상황을 좋게 하려고 다섯째, 남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여섯째,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라는 순위를 매겼다.

선의의 거짓말에 관해 칸트와 콩스탕의 논쟁은 대표적이다. 칸트는 처음 `비진실'이라는 개념으로 선의의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듯하다가 종국엔 선한 거짓말의 정당성조차 부정하는 완고한 입장에 선다. 반면 콩스탕은 진실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사실과 다르게 말할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으로 대립각을 세운다.

거짓말은 목적이 좋고 나쁨을 떠나 남을 속이는 일임은 틀림없다. 하얀 거짓말, 착한 거짓말이라는 모순어법에도 불구하고 이럴 때마다 상황이라는 조건의 정의 딜레마에 빠진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고려한 선한 의도라도 다 좋은 결말을 유도하진 않는다. 극 중 인물인 연다연이 최선으로 내린 애초 하얀 거짓말의 의도와는 달리 더 깊은 갈등을 초래했다. 오히려 처음부터 자신의 뜻과 상황을 분명히 하였더라면 상대방도 쓸데없는 감정 소모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얀 거짓말이 이따금 가난하고 불쌍한 장발장을 구원하는 역할도 하지만 드라마 속 다연처럼 빨간불을 켜기도 한다.

`거짓말도 잘만 하면 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하얀 거짓말조차 긍정적으로 평가하진 않는다.

그래서 융통성 없고 재미없는 사람이라 지탄받기도 하고 더러 손해를 볼 때도 있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도 아니지만 늘 `스스로에게도 정직한 행동인가'되묻곤 한다. 하얀 거짓말도 결국은 상대방의 알 권리를 왜곡하는 편법이다.

어떠한 목적이든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없다. 수단이 목적보다 우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선의 상황을 위한 방편이라도 장기적으로까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는다. 현상을 바라보는 통찰과 지혜를 위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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