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서정(抒情)
8월의 서정(抒情)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8.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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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산을 내려올 때, 그 산은 이미 거기 없다.

가히 역사적이라는 폭염과 고열 따위는 사실상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공익을 위함이라는 설정의 내면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적 몸부림이 있었고, 부인할 수 없이 엄습해 오는 황혼기를 앞두고 세상에서 도태될까 두려워하는 안간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넘치는 의욕과 아직은 젊음이 가득하다는 착각의 사고방식, 그리고 눈앞에 닥친 일을 마다하지 못하는 불치의 미련함이 끝내 염천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는 무모함을 어쩌지 못하고 말았다.

어찌되었든 입추로 접어드는 절기의 변화와 더불어 몇 달 동안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목마르게 했던 산행의 절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어떤 모양의 산을 택해 오를 것인가. 등산 코스는 어디로 정할 것이며, 어느 누구와 동행할 것인가. 세상에는 참 정해야 할 것도, 고민해야 할 것도 많다. 좀 더 잘하고 싶고, 누구보다 더 돋보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번뇌가 성실함과 진정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폄하되고 말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다 부질없는 하산 길. 내려오고 나면 산은 한 때의 추억으로 남아 내 일상에서 결국 지워질 것이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첫 문장은 여름(8월)의 서정 표현에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하다.

폭염과 고열에 신음하고, 세상은 무성하게 푸른 나무와 풀들로 뒤덮여 있다 해도 움직임조차 쉽지 않은 여름은 어쩌면 극한의 쓸쓸함에 지배당하는 계절이다. 숨을 쉬는 일도, 버텨야 하는 일도 쉽지 않은 무더위에 신음하지만 여름은 짙어지고 무르익어가는 쓸쓸함으로 채우고, 또 기다리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통과의례. 시간이 흐르면서 이 또한 지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아직 살아남아 있다.

염천의 8월이 아직 치밀어 오르는 혹독한 무더위를 숨기지 않고 있으나, 꽃들은 이미 잎을 오므리며 지상으로의 추락을 마다하지 못하고 있다.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탄식하며 장렬한 낙화를 택한 능소화의 그리움은 키 낮은 담장이거나, 다른 나무의 줄기에 기대어 줄어들고 있는 해 길이를 마냥 붙들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백일 붉은 꽃 없다는 아쉬움이 무색하게 반질반질 빛나는 줄기와 무성한 붉은 기운을 자랑하던 목백일홍(배롱나무) 역시 따가운 8월 햇살의 눈총을 받아 빛바랜 모습으로 떨어져 바싹 마른 몸을 함부로 흩날리고, 풍성하던 자태는 아랑곳없이 8월의 무궁화는 잔뜩 몸을 말아 떨어진 꽃봉오리를 여전히 서둘러 치우고 싶을 만큼 광복의 그날을 상념하게 한다.

백중은 아직 며칠 남았으니 백 가지 과일과 채소의 풍성함에 대한 기대를 아주 저버릴 일은 아니다. 철창에 가두어 키운 가축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나가거나,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뜨거움과 눈부심으로 짜증지수를 높이는 비닐하우스 안의 작물들이 짓무르는 21세기의 8월.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는 먼지 나는 신작로를 따라 외갓집으로 큰집으로 방학나들이 하던 풍경은 아득한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가두고 덮어씌우면서 풍요를 기다리는 마음은 정직하지 못하다. 겨우 종이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서둘러 펄펄 끓는 뚝배기이거나, 기름 솥에서 마감하는 닭의 생애도 자연으로 되돌려야 하고, 모든 과일과 채소들에게도 갇혀 있는 공기 대신 계곡과 강물, 들판을 자유롭게 흐르는 신선한 바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더위는 가두고, 막으며, 덮어씌운 욕망에 가득 찬 인간의 시설물에서 터져 나와 인간에게 반사되는 것. 그 사이 우리는 햇살에 겨우내 먹을 것을 말리며 뜨거움을 나누고 있다.

문득 밤하늘을 우러르니 별 하나를 품고 그믐으로 치닫는 달. 다시 첫 문장을 고민해야 하는 일상. 산은 언제나, 어디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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