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솥으로 힐링(healing)을
무쇠솥으로 힐링(healing)을
  • 최명임 수필가
  • 승인 2018.08.0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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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명임 수필가
최명임 수필가

 

무쇠솥이 등을 보이고 앉았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의 가슴처럼 벌겋게 타들어 가는 모습에 마음이 쓰인다. 마냥 두었다가는 아주 쓸모없게 될까 걱정이고 삶의 방편이 되었던 어머니의 무쇠솥이 생각나서다. 소댕을 열고 요리조리 보고 있으려니 어머니를 보는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우리 집 부엌의 으뜸은 무쇠솥이었다. 의미의 중요성도 있지만, 태깔도 그랬다. 정지문을 열면 커다란 물 항아리와 질박한 사기그릇과 양은솥이 곁달려 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반들거리는 무쇠솥이었다. 어머니는 솥을 뜨겁게 달구어 기름옷을 입힌 뒤에 정성으로 닦아내셨는데 종부의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세월을 두고 닦으셨다. 그 태깔이 무쇠솥의 본질을 숨긴 흑진주 같았다. 사람의 마음도 갈고 닦으면 명경같이 된다는데 그렇듯 당신의 마음도 녹슬지 않게 기름옷을 입혀가며 비방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목적은 태깔이 아니었다. 식솔들을 위한 애정의 발로이며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종부의 소망이었다.

저 벌겋게 녹 때 오른 솥을 어찌 닦아낼까 고민이다. 방법을 찾아 본래의 모습을 찾아내고 조악한 내 마음도 함께 마름질하면 다듬어진 선가의 사람처럼 결이 고와지려나.

산기슭에 터를 닦았다. 집을 지을 생각이었는데 여의치 않아 정원을 만들었다. 벌건 생땅이 무얼 심어도 뿌리를 내릴 것 같지 않았다. 소똥 거름을 넣고 땅을 걸게 해서 꽃과 나무를 심었더니 그럴싸한 정원이 되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바통을 이어받아 꽃이 피고 겨울엔 설화가 만발한다. 남편과 지인들이 그 귀퉁이에 불쑥 가마솥을 갖다 걸었다. 닭을 잡고 마음이 켕기는지 개는 손해 본 듯 바꿔 와 도르리를 했다. 원시적 DNA가 혈관 속에 녹아 그 습성이 세기를 두고 흘러온 것은 아닌지 몰라.

상상이 선사시대를 더듬어간다. 사냥으로 길들여진 우람한 근육에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슴베찌르개로 사냥감을 향해 내리꽂았을 것이다. 그날 끼닛거리가 해결되면 만족했고 힐링을 외칠 일은 없었을 거다. 주먹도끼에 힘을 실어 사냥감을 해체하던 모습이 저랬을까. 그러면 젖가슴과 아랫도리만 슬쩍 가린 그녀들이 부싯돌로 불을 지폈을 거다. 날것을 먹던 식성이 채 가시지 않아 핏기 남은 살점을 먹었음 직하고 전사의 용맹을 즐겨 떠들었을 거다. 그에 앞서 샤먼의 거친 춤사위와 원시적 언어로 감사의 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시들해졌는지 가마솥이 창고행이 되어버렸다. 솥의 말로를 보는 듯 녹 때가 오르기 시작했다. 불편한 속을 드러냈더니 그깟 것이 그리 중요하냐는 눈치다. 버튼만 누르면 밥이 되는 세상, 알약 하나로 끼니가 해결될 즈음엔 흉물스러운 유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깟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반도를 지켜온 흔적이요, 여인네들의 암묵적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거칠고 온기 없는 무쇠솥을 사다 걸고 생명을 불어넣기까지 솥을 닦고 저를 닦았을 테니 속절없는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고 매서운 정신이 서려 있다.

벌건 녹 때를 닦기 시작했다. 몇 날을 닦아도 어림이 없어 인내가 필요하다. 좌절이 따른다. 한 겹 벗겨 내는 일이 그리 수월하다면 결과 또한 큰 의미가 되지 못하리라. 그 솥에다 밥을 짓고 피붙이들의 먹성 따져 푸짐하게 닭도 몇 마리 잡아야겠다. 움막집 식솔들처럼 옹기종기 둘러앉아 원초적 웃음 한번 실컷 웃어보련다. 힐링이 필요한 객이 문자라도 날려 오면 서둘러 밥을 안쳐야겠다.

올여름엔 무쇠솥 그 진중한 무게와 은근한 깊이로 가슴 뜨거운 힐링을 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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