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향전(2)
청주 향전(2)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 승인 2018.08.0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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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지약해(池若海)가 1656년 신항서원에 이이와 이색 배향을 주도함으로써 서원은 점차 서인계로 변모했다. 그런데 1675년 2차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물러난 후 지역 남인은 지약해의 후사(後嗣) 사건을 들어 이들 충주지씨 일가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는 조카딸을 은진송씨에게 시집 보낸 `그'의 외족이고 제자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인 송국사(宋國士)가 주동이 되어 지역 남인계 인사들을 다시 태학(太學)의 유적에서 삭제하면서 보복하였다. 송국사는 지약해의 동생 지여해(池汝海)의 사위 송국헌의 형이다.

지여해(1591~1636)는 무과에 급제한 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밖 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신 정려가 내려진 인물이다. 이런 연유로 조헌 등과 함께 검담서원에 모셔졌다. 순절하여 의리를 지킨 인물을 내세우며 율곡 이이를 신항서원에 모시고 가장 위에 모시면서 서인 주도의 서원 운영을 꾀하였다.

그런데 당초 충암 김정의 현손 김손현은 그의 고조와 송인수를 이득윤과 함께 제향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게다가 훨씬 세대가 앞선 이색보다 이이를 위에 두는 것에 대해 한산이씨 일가의 반발이 있었다. 광해군 때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의 손자 이무와 장파 후손 이유룡이 즉각 반발한 것이다. `그'와 함께 신항서원에 깊게 관여한 송준길은 이황이 성주 위봉서원의 위차를 세대를 뛰어넘어 결정한 사실을 끌어들여 이이의 주향을 관철했다.

이러한 배향인물의 순서, 위차 시비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대체로 신항서원과 마찬가지로 단지 세대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학문의 성취에 따라 결정되는 곳이 많았다. 학문의 성취도는 당색에 따라 주관적인 판단에 좌우됐다. 따라서 당색을 달리하는 경우보다 극심한 분열을 초래하였다. 옥천 삼계서원의 조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논란은 1680년 경신환국과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서인-노론계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더 이상 신항서원을 둘러싼 논쟁은 사그러들었다. 그 사이 1685년 `그'가 묘정비를 찬술하며 논란을 매조지었다.

그렇다면 신항서원 운영에서 배제된 남인과 경신환국 이후 노론과 결별한 소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청주의 향론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각 문중별 서원 건립에 나섰다. 먼저 1694년 정월 산동신씨(山東申氏)라 불리며 상당산성 동쪽에 세거하던 고령신씨 문중은 선조 때의 명신, 신식(申湜)을 신항서원에 모시고자 하였다. 학문과 효행을 앞세웠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낭성면 무성리에 쌍천서원을 세웠다.

이에 대항하듯 같은 해 가덕면 병암리에는 범(凡) 서인계 서원인 검암서원이 들어섰다. 다분히 이곳에서 우위를 보이던 남인계를 겨냥한 듯했다. 조헌을 가장 위에 두고 서인계 세거 성씨의 주요 인물을 배향하였다.

이듬해 옥산면 환희리에는 범 소론계 송천서원이 들어섰다. 지금은 오창읍 양지리에 옮겨 세웠다. 청주 북부지역 여러 성씨의 입향의 모태가 된 (구)안동김씨 김사렴을 필두로 오창 뜰에 모여 살던 성씨들의 대표 인물들을 배향하여 세를 과시하였다. 또 1699년 청주지역 유일한 소북계 기암서원이 오창읍 기암리에 세워졌다. 진주강씨, 보성오씨 문중서원이다.

가히 17세기 말은 서원 남설(設)의 시기였다. 지역 명현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쟁과 향전을 거쳐 이제는 문중서원 건립 붐을 이뤘다. 1701년 고령신씨 봉계서원과 초계변씨 송계서원, 1710년 안동권씨 백록서원 등 서원이 갖는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유력 문중의 서원 건립과 사액 요청은 거듭되었다.

청주 안팎으로 서원 건립이 붐을 이루던 1696년, 조선 후기 정치·사상을 주도한 대명의리의 해방구, 화양서원이 청주목 청천면 화양동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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