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민주주의의 보루
무너진 민주주의의 보루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8.0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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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에 그토록 사활을 건 이유다. 그의 재임 중 작성됐다는 대법원의 충격적인 문건들을 보면 행정권 남용을 넘어 사법 농단의 책임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대법관 업무가 과중해 상고제도 개선이 시급한 것은 사실이다. 상고법원 설치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맞다. 일반 민·형사는 상고법원이 맡고, 판례 변경 등으로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은 대법원이 맡아 상고심 처리의 효율을 높이겠다는 취지도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막대한 인력과 예산이 투입되는 거대 행정기구의 신설은 가볍게 추진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법관을 대폭 늘려 업무를 분담하자는 대안이 설득력 있게 제시됐던 것이다. 상고법원 설치는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법조 안팎에서 반대도 만만찮았다. 4심제 논란과 위헌시비가 일었고 상고법관 임명방식을 놓고도 이견이 노출됐다. 따라서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관철하려면 충분한 논의와 설득의 과정을 거쳤어야 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반대하는 판사나 법조단체 등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사찰과 압박에 나서는 변칙을 택했다.

차성안 판사는 시사주간지에 상고법원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했다가 사생활까지 정밀 사찰을 당했다. 법원 행정처는 차 판사를 압박할 구실을 찾기 위해 그가 동료 판사들과 주고받은 이메일과 재산관계까지 조사했다. 상고법원에 반대한 하창우 전 변협 회장은 사건수임 내역까지 털렸다. 대한변협은 상고법원 대신 대법관을 50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가 대가를 치렀다. 대법원은 변호사 평가제 도입과 변협신문에 게재하던 광고 중단을 들이대는 졸렬한 방식으로 변협을 윽박질렀다.

무려 60장 분량의 국회 로비전략을 보면 로비의 귀재라는 대기업도 울고 갈 정도다. 의원 개개인을 찬성, 약한 찬성, 반대, 약간 반대 등으로 성향을 세분하고 맞춤형 대응전략을 짰다. 의원들이 연루된 소송까지 들여다보고 대책을 세웠다. 언론 대책 역시 치밀했다. 대상을 지방언론까지 확대하고 방송 시사프로에 등장하는 패널들의 성향까지 일일이 분석해 대책을 마련했다. 청와대와 국회, 언론 등을 망라한 촘촘한 대응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면서 적잖은 시간과 인력을 소모했을 것이다. 폭주하는 소송업무 처리에 파김치가 되고 있다는 대법원의 주장이 공허해진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대법관처럼 상고법원 판사 인사에도 대통령 몫을 보장하겠다는 취지의 문건이다. 대법원장이 판사 인사권을 청와대에 헌납하겠다는 것은 3권 분립이라는 민주주의 원칙과 헌법을 거부하겠다는 반국가적 발상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다른 대안을 무시하고 유독 상고법원 설치에 집착한 것은 판사 인사적체 해소와 대법원 위상 제고를 위해서라는 시각이 많다. 기관을 늘려 인사 폭을 넓히고 대법원에 맞먹는 산하 법원을 거느림으로써 대법원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법조사에 상고법원을 설치한 인물로 영원히 기록되길 원했다는 것이다. 대법원 문건에는 국민을 `(굳이 자신의 재판을 대법원까지 끌고 가려는) 이기적인 존재'로 묘사했다. 법원은 국민이 재판받을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존립이 가능한 기관이다. 주권자를 대놓고 모욕한 문건을 보면 상고법원 설치가 국민의 불편보다는 조직 이기주의와 수장의 공명심에서 출발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법원은 국민으로부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듣고 있다. 판사들 중에서도 엘리트들이 집결된 대법원은 국민이 보내주는 이 무한신뢰에 보답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대법 판사들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1인 독주에 일사불란하게 종사했고, 대법관들 증에서도 누구 하나 제동을 걸지 못했다. 기가막힌 실상이 드러났는데도 실제 재판거래는 없었다는 변명만 합창하고 있다.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해놓고는 검찰이 청구하는 압수수색 영장은 건건이 기각하고 있다. 검찰에 도망 다니는 구차한 행색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는 보이지 않는다.

법원이 풀어야 할 숙제는 상고법원 설치가 아니라 특별재판부 구성이라는 초유의 망신을 당하기 전에 추락한 신뢰와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다. 수사 협조를 넘어 사법농단의 실체와 책임 규명에 스스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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