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록
이형록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8.08.0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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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를 말하다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1930년대 당시 사진작품활동가는 주로 일본인이었고, 한국사람은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사진을 찍어 작품을 이루겠다는 열정은 대단했어요.”
일제 강점기인 1934부터 사진 활동을 시작한 이형록은 당시의 회상을 이렇게 떠올렸다. 20대 초반 강릉농고를 졸업한 그는 가사를 도와야겠다는 심정으로 형님 이상록이 운영하는 사진기재상 겸 사진관인 창륭사진관에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때마침 이곳을 드나들던 사진가 임응식과의 만남을 그를 본격적 사진인으로 들어서게 하는데 자연스러운 계기가 되었다.
부산에서 사진활동을 하던 임응식이 강릉으로 이사해 강릉사우회를 조직했고, 그 일원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던 그는 동료 10여명과 함께 1937년 창립전을 열고 회화주의 사진과 정물 등 50여 점을 선보였다. 그는 살롱픽처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계조를 중요시하고 톤의 조화가 감각적인 것에 역점을 두어 찍었다고 회고하면서 정확한 노출과 구도는 온통 감미로운 일색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사용한 카메라는 베비파루(127필름사용)로 렌즈성능이 뛰어났는데 당시 승용차 1대 값에 비유할 정도의 비싼 수준이었다고 한다. 1937년 조선일보 주최 `약진조선의 표정' 공모전에 `도시의 구도'를 출품, 특선하였고 또 38~40년까지 경성일보 주최 조선사진살롱 공모전에서 `전원', `수확', `사양' 등으로 연속 3회 입선하는 실력을 자랑했다.
1945년 광복 후 서울 장로교총회신학대학에 입학한 그는 3년 후 결혼했다. 1950년 6·25동란 때는 국군 8사단 종군사진기록요원으로 나서 대구, 영천, 포항과 다부동전투 등지를 필름에 담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부산에서 올라온 사진인들을 규합, 사진협회를 창립, 본격적으로 활동한 그는 53년 휴전이 되자 남은 신학대학 수업 이후 목회자가 아닌 평생 직업으로 사진가의 길을 택했다.
그는 가족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캘린더사진을 찍었으나 차츰 인간중심의 리얼리즘 쪽으로 변신했다. “언제까지 풍경을 찍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은 회화흉내는 끝을 내자고 맹세했어요.” 이러한 집념은 새로운 사진사조로 인간의 내면에 담겨 있는 희로애락의 사실성 추구에 초점을 맞췄다. 1955년 신선회를 창립한 그는 60년 싸롱 아루스를 조직, 회장으로 서울 중앙공보관에서의 작품전시를 계기로 하여 더욱 맹렬한 사진활동을 벌였다. 이때 그의 영향을 받은 사진가들이 오늘날 한국 사진계의 중추가 된 황규태, 이창환, 주명덕, 박옥수, 박영숙, 전몽각 등 13명에 이른다.
지금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거리의 구두상, 1956'은 길거리 담벼락이라는 배경이 무색하게 잘 차려진 가게에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구두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었고, 구색을 갖춰 걸려 있는 가방과 우산들은 이 가게의 주인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업에 임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가 남긴 사진에는 특별함이 있으니 그것은 유난히 어린이를 찍은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어린이 사진이 전체 사진 중 절반에 이른다는 점은 어린이의 존재가 어른의 시선을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음에 이형록 사진작업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온 국민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고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면 이형록의 사진세계가 말해주는 바가 한국적 시각언어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가 이룩한 한국 리얼리즘 사진적 접근방식은 한국 사진 역사에서 탐과 의지로 점철된 우리 국민의 역사를 기억하는데 큰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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