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포에 부는 바람
후포에 부는 바람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8.07.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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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사진을 보자마자 당장 만나고 싶었다. 작은 언덕 위에 선 청년은 듬직한 어깨를 활짝 펴고 고요하게 바다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람에 슬쩍 흔들리는 깃이 그를 당당하고도 부드럽게 보이게 하고, 한번 지나는 사람이건 다시 찾아올 인연이건 곁에 누가 서든 상관하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한 뒷모습은 분명 사진으로 처음 만났지만 낯설지 않다. 그 옆에 가만히 앉아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었다. 방학하는 날 곧바로 후포로 달려갔다.

후포의 골목은 추억을 불러온다. 소박한 삶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낮은 담장, 절반 열려 있는 대문들, 정작 어느 집에도 들어가진 않지만 어느 집에라도 들어가도 될 것 같은 정감을 내 맘대로 품어볼 수 있다. 그 한쪽에 벽화마을이 있다. 좁은 골목마다 푸른 바다와 갈매기, 대개, 꽃들과 고양이, 다람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조용히 만나고, 계단을 천천히 오르면 온통 파란색인 지붕들이 시선 아래로 내려가고 산자락의 집들조차 저 멀리 낮아진다.

등기산 정상에 이르자 바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너른 어깨로 깊은 그늘을 만들고 온몸으로 짭조름한 해풍을 부르며 이곳에 서서 바다만 바라본 지 백 년은 더 된 듯한, 사진에서와 똑같은 모습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이 아슴푸레 둥글다. 반갑다, 큰 나무. 그런데 한편으로는 당황스럽다.

나무 왼쪽 아래에 있던 벤치가 없다. 대신 널따란 데크가 만들어져 있고, 나무의 오른쪽에는 돌로 만든 커다란 카누가 새로이 놓여 있다. 나무 앞에는 남녀가 마주 보는 조각품이 설치되어 있고, 바람에 일렁이던 초록빛 풀들 대신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한 잔디가 덮여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도 전에 하얀 등대가 화려한 조명에 비추어 색색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등대 아닌 등대였다. 이곳은 전혀 새로운 풍경으로 변하고 있다. 아쉽다.

충주에도 이렇게 건장한 청년 같은 크고 멋진 나무가 여러 그루인 곳이 있다. 바로 충주세계무술공원이다. 현재 살아있는 어느 사람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곳의 모든 변화를 자랑스럽게 또는 안타깝게 지켜봤을 큰 나무들. 충주에 이 공원이 조성되었을 때 이 멋진 나무들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곳은 탄금대와 연결되고, 강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 길과 산책로가 이어져 그야말로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었다.

가로등은 빛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고풍스러운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구석구석에 품위와 여유를 넣은 이 공원을 디자인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보게 하였다. 이렇게 드넓고 멋진 공간이 충주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마치 온전히 내 것 같은 풍요로움과 여유를 느꼈다.

그런데 최근 이곳에 라바랜드와 라이트 월드 등 여러 시설이 생겼다. 마음을 열어 보려고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가 생뚱맞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전의 공원이 일상적인 모습이어서 매일 방문해도 될 것 같은 공간이라면, 지금은 강렬해 특별한 몇 번만 방문할 것 같은 곳이라 왠지 내 공간을 빼앗긴 느낌이 든다. 더욱이 라이트월드의 영역을 표시하는 철조망은 사라질 수 있을까, 지날 때마다 아쉽고 무력한 느낌이 든다.

사람이 만드는 건축물은 짧은 시간에 건설되지만 큰 나무는 긴 시간이 지나야 만들어진다. 마음의 평화와 여유는 빼곡하고 화려한 것 사이에서 자라나지 않는다. 빈 곳이 필요하다. 아마 후포의 큰 나무에 느낀 매력은 나무 자체라기보다도 그를 둘러싼 너른 여백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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