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향전(1)
청주 향전(1)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 승인 2018.07.2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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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고려 태조 왕건은 청주 땅을 일러 땅이 기름지고 호걸이 많다고 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잦은 반란에 시달리고,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면서 청주에 대한 애증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청주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왕권의 안정도, 후삼국의 통일도 요원했던 것이다. 두 차례나 행차하여 성을 쌓는 등 청주에 대한 애정을 쏟았다. 결국, 가까운 회인(懷仁) 호족 공직의 귀순으로 힘을 얻어 후백제에 대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신라가 삼국통합을 이룬 후 서원소경을 설치한 것이나 고려 때 큰 고을인 목(牧)을 두어 가치를 더했다. 조선에 들어서도 충청도를 대표했다. 물론 역모 사건 등으로 현(縣)으로 강등되어 홍충도니 공충도니 이름이 자주 바뀌곤 했지만 곧 지위를 되찾았다.

조선 전기 청주 출신 인물의 역할도 두드러진다. 개국공신에 여럿 이름을 올렸고, 훈구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더욱이 사림으로 권력이 옮겨가는 순간, 명현으로 여럿을 꼽을 수 있었다. 조선 중기 들어 사림이 권력을 차지하면서 사화로 희생된 인물들은 그들의 연고지 서원에 모셔졌다.

당연히 호걸 많던 청주에도 이곳 출신 인물들을 제사지내고 학문을 닦던 서원을 세우게 되었다. 1570년(선조 3) 조강(趙綱)은 효자 경연(慶延)과 기묘·을사사화 명현인 김정(淨), 박훈(朴薰), 송인수(宋麟壽)를 모신 유정서원(有定書院)을 세웠다. 조강은 송인수의 제자로 청주로 옮겨 살고 있었다. 유정은 지금의 이정골로 고을 동쪽 10리쯤, 상봉재 아래였다. 1632년 한충(韓忠), 1650년 송상현(宋象賢)을 더하고, 1654년 나라에서 유정서원이란 현판을 받았다. 사액서원은 임금이 친히 현판을 써 내리는 영예와 나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특혜가 베풀어졌다.

그런데 1654년(효종 5) 사액과 두 해 뒤 이색(李穡)과 이이(李珥)를 더 모시는 과정에서 서인 세력이 대거 가담했다. 특히 율곡 이이를 모시면서 신항서원은 서인계 서원으로 거듭났다. 또 1660년 신항서원(莘巷書院)이라 이름을 바꿔 사액됐다. 한 해 전 기해예송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권위를 더한 결과였다. 단지 땅이름에 불과한 유정을 대신해 고사를 빗댄 신항이란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1665년(현종 6) 이이를 따로 위에 두고, 나머지 7분은 세대별로 위판을 마련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고려 말에 활동했던 이색을 아래에 둔다는 것은 한산이씨의 반발을 초래했다. 하지만 서인의 종주로서 학문과 도의를 내세운 서인들의 의견이 결국 관철됐다. 이때 이득윤(李得胤)을 더불어 모시면서 아홉 분을 모시게 되었다. 따라서 사당 이름도 구현사(九賢祠)라 했다.

신항서원이 서인 주도의 서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지역 남인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신항서원을 둘러싼 다툼은 중앙 붕당정치와 연동해 전개됐다. 현종이 돌아가신 후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하자 청주지역에서도 남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먼저 청주지역 서인을 이끌었던 지약해(池若海)의 후사 사건으로 서인들이 궁지에 몰렸다. 지약해는 지봉익을 양자로 들였는데, 그는 형제 항렬이었다. 지봉익도 죽음에 미쳐 양자 입안을 파기하고 다시 지봉익의 아들 지응삼을 지약해의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지응삼도 이미 양자로 나갔다가 형제 항렬로 밝혀져 되돌아온 일이 있어, 결국 생부나 양부상에 모두 삼년복을 입지 못했다.

예송처럼 예법에 따라 정권이 바뀌던 첨예한 시기인데다 당쟁으로 존폐를 거듭하던 와중이라 지약해 부자는 유적에서 삭제됐다. 이에 서인들이 보복 조치에 나서 지약해 부자 삭출에 앞장선 남인계 인물을 성균관 유적에서 삭제하면서 보복했다. 다시 청주지역 남인들이 서인 인사들을 탄핵했고, 조광조와 이황을 신항서원 모시려 시도했다.

하지만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지역 남인들의 저항에도 신항서원은 서인들의 의도대로 개편됐다. 특히 1685년 ‘그’가 신항서원의 묘정비를 찬술하면서 모든 논란을 사그러들고, 신항서원은 서인-노론 서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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