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 무대에 서다
합창 무대에 서다
  •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 승인 2018.07.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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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글쓰기에 이어 뒤늦게 겁 없이 뛰어든 남성합창단. 첫 공연을 앞두고 비교적 담담한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며 무언가를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하는 일이다. 공연장이 다가올수록 수많은 관중의 기대에 찬 눈빛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묘한 흥분과 긴장감이 더해져 약간 울렁거렸다.

현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나와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대 위 자리를 확인하고 분위기를 익히는 짧은 리허설을 마친 뒤 새로 맞춘 턱시도를 입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공연의 시작을 자각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악기를 조율하듯 마음을 가지런히 다듬는 일이었다. 깨끗하게 다린 주름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손가락이 약간 더듬거려졌다. 의관이 갖추어지자 스스로 가슴이 펴지고 허리가 꼿꼿해졌다. 그러나 자주색 나비넥타이와 허리밴드는 아무래도 남의 것인 양 어색했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가족들에게 이 순간을 보내고 싶었다. 동료 단원들과 함께 찍기도 하였는데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날아갈 듯 엇비스듬히 달린 나비넥타이와 위아래가 바뀐 허리밴드는 그 순간이 첫 경험이란 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처음이란 것은 그렇게 옷을 입는 단순한 동작마저도 어설프고 서투르다. 하지만, 어쩌랴. 이순의 나이를 넘기고 나서도 새롭게 시작하는 `처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오십여 명이나 되는 단원이 순서에 맞추어 무대로 나갔다. 연습한 대로 내 자리에 우뚝 섰다. 무대 뒤에서 떨리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침착해지면서 우리를 바라보는 관중의 움직임도 눈에 들어왔다. 2층 뒷부분에 몇 군데 빈자리도 눈에 띄었다. 첫 곡은 그런대로 잘 부른 것 같았다. 강약과 빠르기 등 악보에 표시된 여러 가지 기호를 놓치지 않았고, 틀리기 쉬운 부분에서도 음과 박자를 제대로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곡부터 갑자기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악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악기 연주 중 `삑' 소리가 나듯 혼자 툭 튀어나오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렇게 적당하게 묻어 넘어가는 것이 그날 나의 역할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사회에서건 주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배경이나 굄돌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마 그날 나의 역할은 그 정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첫 곡보다 오히려 두 번째 곡에서 중심을 잃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지휘자의 몸짓과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휘자는 파트별 고유의 음을 모아 화음을 만들고 박자와 호흡이 어우러지도록 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반주자를 포함한 한 사람 한 사람 단원들의 감성을 어루만져 몰입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었다. 온몸의 동작뿐만 아니라 얼굴의 다양한 표정과 눈빛을 통해 음정과 박자라는 단순한 신호이상의 무언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연습시간에 많이 틀렸던 부분과 강조했던 중요부분에서 지휘자는 간절함을 표시했다. 불안했던 단락이 무사히 지나가자 `잘했다~' 하는 격려와 `끝까지~' 라는 다그침의 신호가 왔다. 그 신호는 말로써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순간적 메시지였지만 강하게 와 닿았다.

합창은 여럿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세계였다.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은 겉모습 일부였고 나 혼자의 상상이었을 뿐이었다. 아직은 그 내면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한 번의 공연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내가 알고 있었던 피상적 관념은 깨졌다. 좁은 집안을 벗어나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처럼 내가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세상은 관념이 그려낸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앞으로 깨우쳐 가야 할 세계가 얼마나 많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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