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닮은 어머니
그림자를 닮은 어머니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8.07.1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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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날, 청량감이 넘치는 빽빽한 은행나무이파리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구백 년을 먹었단다. 청주중앙공원 복판에 청주압각수(淸州鴨脚樹)라는 별칭을 단 은행나무, 나뭇잎이 오리발처럼 생겨서 압각수라는 이름이 붙어져 있다.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 아래 한갓지게 노니는 비둘기와 어르신들의 두런두런 이야기가 익어간다.

햇살만큼 풍요로운 공원풍경. 사정없이 내리꽂는 볕을 한 손으로 가려가며 책을 보던 노인은 코에 걸인 돋보기를 끌어올리며 은행나무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활처럼 휜 등을 쭉 펴며 예전의 아버지처럼 한 손으로 연신 등을 툭툭 두드린다.

아버지가 청년 시절에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허리춤에 오던 나무가 훌쩍 커버려 잔가지가 담장 밖으로 외도했다. 말없이 바닥에서 따라다니던 그림자는 담장을 뛰어넘지도 못하고 담벼락에 걸려 턱걸이를 하곤 했다. 은행나무가 가지를 뻗기 시작할 즈음 아버지의 전업농사는 뒤로 밀쳐지고 사회의 각종 단체 활동을 시작하셨다.

또한 자손들에겐 가난과 굶주림을 물려주지 않으려 전답을 팔아 배움에 투자를 하셨다. 당시 삶은 흙에서 뿌리를 내리고 거두는 농업이 전부였기에 딸들에게 배움의 길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지만, 끝까지 고수하며 진학시켰다.

반면 그림자를 닮은 어머니는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서면 큰일이라도 되는 양 그저 울타리 안에서 해바라기 같은 삶을 사셨다. 아버지의 반건달농사와 외부활동을 지켜보며 목돈마련을 위한 엽연초경작을 하셨다. 자기 색깔과 주장이 강한 요즘 여성들과 비교하면 시어머니가 계시지도 않았음에도 시집살이 석삼년을 사셨고, 아버지를 조명받는 일인자로 만드시면서 당신의 삶은 그림자였다.

건조장 옆 울타리 같은 은행나무는 청주압각수처럼 커다랗지는 않지만 어머니에게 은행나무는 세상 무엇보다도 큰 나무로 한숨을 가려주는 그늘이었다.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안식처였다. 늘 바깥일에 열중이셨던 아버지의 생활 때문에 어머닌 파란이파리가 누레지면 가슴 속도 누렇게 병들어가는 것을 치유하는 양 일에만 묻혀 사셨다. 밭일을 하시다가도 팽개치다시피 삽자루를 던져놓고 홀연히 바깥일을 보러 가시는 아버지 때문에 홀로 들에서 일하시는 시간이 많은 어머닌 적적하고 쓸쓸한 마음을 은행나무그늘에서 삭히고 계셨을 터. 그런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어머니의 젊은 시절엔 사랑의 징표보다 수많은 사연을 품고 우직하게 지켜봐 주는 동반자로서 의지하고 있었을 게다.

언제부터인가 이파리가 서서히 타들어가면서 은행나무는 겨우겨우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있을 무렵 어머닌 삶을 내려놓으셨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건조장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내리고, 검은 머리에 하얀 박꽃을 피운 아버지 이마에 골 깊은 주름을 많이 늘었다. 걸음걸이도 둔해지셨다.

내게 은행나무는 아픔이다. 고목으로 자리를 한참을 지키고 있던 은행나무도 베어지고, 폐가처럼 흉물스럽던 건조장도 허물어버리고 그 자리엔 훤한 텃밭이 만들어졌다. 암, 수가 마주 봐야 열매를 맺는다 했는데 어머니가 떠나고 홀로 지내는 아버지는 예전의 어머니의 긴 그림자처럼 쓸쓸해 보인다. 다행히도 아픈 추억을 반추하기보다는 매일매일 성장하고 있는 텃밭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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