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관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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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7.0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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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나라를 빼앗겼단 소식을 들은 황현(黃玹·1855~1910)은 아편을 삼켜 음독자살했다. 시골 선비가 택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가 남긴 <매천야록>이 있어 당시의 실상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 중 뜻밖인 글이 있다. 당시 횡행하던 탐관오리로 충무공과 문정공의 후예 아닌 이가 없다는 글이다. 충무공은 곧 이순신이고 문정공은 곧 우암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무신(武臣)과 문신의 후손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글이 그렇다.

당시 돈으로 벼슬을 사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같은 책 또 다른 일화가 전한다. 을사늑약에 저항해 순국한 민영환(閔泳煥·1861~1905)의 경우다. 생전 외삼촌 서상욱의 벼슬자리를 임금께 여러 차례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결국 민영환의 어머니가 오만냥을 바친 후에야 비로소 광양군수를 얻을 수 있었다. 임금의 외척마저도 뇌물 없이는 허사였다.

이처럼 만연한 매관매직은 멸망을 재촉했다. 비록 과거제도가 갖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렇지만 과거로 인해 한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문벌로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3년에 한 번, 혹은 여러 경사가 겹칠 때마다 실시한다 하더라도 문과 시험 합격자는 최종 33명에 불과했다. 반면 과거는 수없이 많은 사화로 선비들이 죽어나갔어도 끊임없이 양반 관료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여태껏 반란이 성공한 적이 없으니 과거는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다.

실제 조선왕조 500년 동안 문과는 804회 실시하였으나 급제자는 15,151명에 불과했다. 매년 30명 안팎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사망 등 자연감소 인원을 고려한다고 해도 급제자마저도 문벌에 따라 출세가 지연되곤 하였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과거 급제자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 소과와 대과(문과)를 거쳐 관직에 나간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대부분 음서(蔭敍)의 혜택을 누렸다.

물론 한때 재야의 인재인 산림(山林)을 등용하기도 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특별 임용한 사례다. 그마저도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유명무실화되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수 문벌이 관직을 독점하는 말폐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보다 앞서 대가(代加)라는 제도는 문벌이 유지될 수 있었던 핵심이었다. 관료는 일정 기간을 근무해야 승진하였는데, 다양한 이유로 특별히 승진하는 기회를 얻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승진에는 반드시 기한을 정했으니, 실제 승진이 불가한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승품(陞品)의 기회를 아들, 조카, 사위에도 줄 수 있는 것이 대가였다.

자연 고관을 배출한 가문의 경우 친인척들도 과거 급제 없이 품계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정5품 통덕랑으로 제한했지만 고된 과거 공부 없이도 손쉽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더욱이 대과 급제자 중 현직관료 합격률이 높아가고, 또 현직관리를 대상으로 실시하던 중시(重試)가 10년마다 베풀어지니 정5품의 제한마저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지역은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말기 들어 서울사람들이 관직을 독점하면서 세도정권을 이뤘으니, 금의환향은 일제강점기 고시의 부활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갔다. 2008년 총선과 대선 이후 `지잡대'로 지역을 차별하듯, 오늘날 점점 개천에서 용난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오히려 지역은 점차 세습적 지위가 고착화되고 있다. 대물림 현상은 학습 기회와 좁은 취업문, 노후 빈곤으로 양극화되어 간다. 이백여 년 전 왕조의 멸망을 재촉했던 집중화와 양극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빽' 없는 청년은 비빌 곳이 없다. 함께 고민할 권력이 필요하다. 단체장이 새로 뽑히면서 기대도 크다. 그만큼 지자체 운영에 지혜가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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