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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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0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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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자신을 성찰하는 삶

김 훈 일 주임신부 < 초등성당 >

제5공화국 시절 경찰서나 관공서에서는 '정의사회구현'이라고 쓰여진 현판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부의 각오와 의지가 보이는 표현이다.

그래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 시대의 권력자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교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 술만 먹으면 행패를 부리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분이 정의로운 사회를 해치는 분이었는지 어느 날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정의로운 사회에 맞는 사람으로 교육받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더 상태가 나빠져 보였다. 그리고 그 아저씨의 최후는 더 비참했다. 더 나쁜 사람들이 덜 나쁜 사람들을 교화시킨다고 하니 그 결과가 좋을 리가 없다. 인간의 변화는 외적인 강압에 의해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에서 시작되어 외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과 이웃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내적인 성찰을 해야 한다. 그 내적인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깨닫는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스러운 삶과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고 이웃의 잘못을 고치려 한다면 큰 불행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죄는 자신에 대한 성찰 없이 이웃을 단죄하는 데서 생긴다. 따라서 내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내적인 변화는 성찰 즉 내면의 선한 의지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이러한 노력을 따르지 못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킬 귀한 시간과 장소를 찾게 된다. 지금 가톨릭교회는 사순시기(Quadragesima·四旬時期)를 보내고 있다. 사순시기는 부활의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설정된 40일간의 기간을 말한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그리스도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했던 사실에서 유래된 숫자다. 구약성경에서도 40이라는 숫자는 노아의 홍수기간, 모세가 십계를 받기 전 단식기간,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방랑기간, 호렙 산에서 엘리야가 기도하던 기간 등이 모두 40이라는 숫자와 연결되어 있다. 40이라는 기간을 참회와 속죄, 극기의 시간으로 보낸 이들은 모두 새로운 역사와 삶을 얻었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40일의 의미를 되살려 40일간의 특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사순절이 되면 천주교 신자들은 이미 받은 세례를 다시 생각하고 참회와 속죄와 절제의 행위를 통해서 부활의 신비체험을 준비한다. 이 시기는 재(灰)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날 사제는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뿌리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 예식을 통해서 신자들은 허무하게 먼지처럼 사라질 인간의 운명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참회와 속죄를 통해서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사순시기를 시작한다. 우리 사회도 이런 정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도 정치와 사회에 많은 부분에서 자신을 성찰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성실히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을 아프게 하고 있다.

먼저 내 죄와 실수와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한다. 가슴을 치며 뉘우쳐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삶과 역사가 보이는 것이다.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보아야 하고, 굶주리려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의 삶을 보아야 하고, 억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재주가 뛰어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이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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