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 못 읽는 대법원
민심 못 읽는 대법원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7.0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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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검찰과 대법원이 법원행정처 컴퓨터 하드디스크 제출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와 관련해서다.

검찰은 주요 관련자들이 사용하던 컴퓨터 하드디스크 원본을 추가 요구하고 있다. 행정처가 이미 제출한 자료가 컴퓨터에서 임의 키워드로 추출한 410개 문건에 불과해 실질적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다.

대법원은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제출할 경우 사건과 무관한 개인정보 등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의혹의 핵심인물인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현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저장장치를 영구적으로 폐기하는 `디가우징' 방식으로 처리된 사실도 드러났다.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은 법관이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개개인의 소신에 따라 판결할 수 있도록 절대권한을 보장하고 있다. 반면 판결에 반영된 법관의 양심과 소신은 판결문을 통해서 고스란히 공개된다. 독립권이 보장되지만 공식 업무는 공개되는 것이 법관이라는 직업의 특성이다. 업무용 컴퓨터에 디가우징 장비까지 사들여 영구 삭제해야 할 민감한 내용이 담길 여지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두 사람의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 처리된 시기도 석연찮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대법원 자체 조사가 이뤄지고 추가 조사가 결정되던 시점을 전후해 실행됐다. 법원은 퇴임 대법관 컴퓨터에 대한 다가우징 처리가 관행이고 규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 취임 후 디가우징이 도입된 사실 앞에서는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다. 증거 인멸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달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법원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응답자의 63.9%가 법원판결을 믿지 못한다고 답했다. 신뢰한다는 응답은 27.6%에 불과했다. 법원을 신뢰하는 국민이 10명 중 3명도 안되는 셈이다. 이는 원칙적이고 철저한 수사를 받으라고 법원에 내린 국민의 명령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민심과 동떨어진 행보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달 전국법관대표회의와 전국 21개 법원 판사회의가 “형사 절차를 포함하는 성역없는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지만 대법관들은 오명을 씻으려는 소장 판사들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들은 “재판거래 의혹은 근거가 없다”며 “국민에게 혼란을 주는 일이 계속돼선 안 된다”는 낯두꺼운 입장을 밝혔다.

실체적인 재판거래가 없었다고 해서 묻힐 일이 아니다. 3권분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누구보다 앞장서 수호해야 할 법원의 총수가 대통령을 만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한 협조를 운운하며 공치사를 한 것부터가 심각한 헌정질서 유린 행위이다. 대법원장이 판사를 넘어 일반인인 민변 구성원을 사찰한 정황까지 드러난 마당이다. 그런데도 대법관들은 국민을 오도된 정보에 현혹돼 혼란을 겪는 대상으로 폄하하고 있다. 불손을 넘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이 묻어난다. 법원이 국민으로부터까지 독립된 기관일 수는 없다.

이제 대법원이 할 일은 검찰에 적극적으로 자료를 제공하고 수사에 협조하는 것밖에 없다. 미적거릴수록 검찰에 강제수사 명분만 쌓아줄 뿐이다.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보통 오판이 아니다. 엊그제 103개 시민사회단체가 시국회의를 열어 사법 농단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법개혁 등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같은 시민적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의뢰를 검토하던 당시 “뼈와 살을 도려내야 하는 고난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 비장한 각오는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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