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와 곰의 낙원 - 청주 두루봉 동굴 처녀굴
코뿔소와 곰의 낙원 - 청주 두루봉 동굴 처녀굴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07.0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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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80년 8월. 두루뭉술한 두루봉의 8부 능선쯤에서 석회암 발파로 막혀 있던 새로운 굴이 드러났다. 일부이기는 하나 동굴 천장과 벽, 내부 퇴적층 등이 구석기시대에 형성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약 20만년 전 두루봉 구석기인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이 오랜 세월의 무게를 잘 견디며 본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변형이나 훼손의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굴을 “처녀굴”이라 이름하였다. 처녀굴이었기에 땅속에 묻혀 있을 역사의 증거물들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처녀굴의 발굴은 1980년 8월 8일~21일과 9월 30일~10월 5일의 2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때는 계엄령이 선포되어 대학은 휴교로 수업이 중단되었고, 교정에는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어 학생이 학교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다. 강의실 대신 동굴유적 현장에서, 책 대신 구석기인들의 흔적을 찾는 작업에 집중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던 역사의 실체는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 있기조차 힘든 절벽 모퉁이의 좁은 공간, 퇴적물이 쌓여 앉을 수도 없는 낮은 동굴 내부, 위험요소들이 에워싼 발굴장 등 조사여건은 최악이었다. 그러기에 로프에 의지하며 진행하는 발굴작업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많은 유적 발굴 중 가장 위험하고 힘든 발굴로 기억된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나는 동물화석들. 대부분이 처음 보는 자료들이었다. 어떤 동물의 어느 부분 뼈대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분석결과 큰 원숭이, 쌍코뿔소, 곰, 하이에나, 말, 큰꽃사슴 등 큰 젖먹이동물들로 지금은 모두 멸종된 동물화석들로 밝혀졌다.

불곰의 변종으로 가늠되는 곰 화석은 발굴 후 6년간의 노력으로 완전한 개체로 복원되었다. 완전 개체로 복원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중국에서도 주구점 산정동 동굴출토 어린 곰화석 1점뿐이다. 희귀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약 500만년 전의 미니머스곰에서 후기 갱신세 말기의 동굴곰으로 진화해가는 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곰화석의 성별은 성숙한 개체의 경우 송곳니의 너비를 측정하여 판별할 수 있다. 처녀굴 곰은 송곳니 너비가 수컷의 범주에 들고, 음경골(陰莖骨, 길이 14.1cm)이 출토되어 수컷임을 알 수 있다. 나이는 이빨의 발생단계 및 마모도를 측정하여 가늠할 수 있는데, 처녀굴 곰화석은 위·아래턱의 영구치가 모두 발생되어 있고, 모든 이빨들에서 에나멜질의 마모와 상아질의 노출이 관찰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암컷의 경우 번식능력이 현저하게 쇠퇴하는 시기로 갱신세 시기 곰화석의 최대잠재수명의 약 67% 정도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생 불곰의 경우 이 시기는 15살 이후에 나타난다. 따라서 처녀굴 곰화석은 최소 15살 이상된 늙은 곰으로 판단된다. 이 곰은 동면 중에 사망한 것으로 영양결핍이나 노화가 주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코뿔소는 완전한 아래턱(길이 56.9cm)과 주요부분 뼈들이 출토되어 한 개체로 복원되었으며, 쌍코뿔소로 판별되었다. 이 밖에 낱개로 출토된 이빨들을 분석한 결과 어린 코뿔소에서 어른 코뿔소에 이르는 최소 8마리 이상의 코뿔소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어 두루봉은 코뿔소의 낙원이었던 듯하다. 쌍코뿔소의 등뼈, 허벅지뼈, 갈비뼈 등에서 자른 자국과 긁은 자국이 남아 있어 사냥과 도살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당시 두루봉 구석기인들은 집단 사냥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멸종된 다양한 젖먹이동물들이 서식하던 두루봉, 이들 동물을 사냥하여 생계를 이어나갔을 두루봉 구석기인들. 파괴되어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두루봉 유적. 위험하고 힘든 발굴기억. 이 모든 것들이 가슴에 메아리치듯 두루봉 구석기인들의 울림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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