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켜버린 차용증
삼켜버린 차용증
  • 김경수 시조시인
  • 승인 2018.06.2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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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경수 시조시인
김경수 시조시인

 

어느 식당 한켠에 어떤 할머니가 식당주인과 마주 앉아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구십이 다가가는 나이로 온 종일 거리를 떠돌며 생계를 꾸려야 하는 독거노인이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그 언제부터인가 슬며시 중년의 여자가 다가와 딸처럼 행세하며 친절을 베풀었다. 할머니는 늘 외롭던 터에 그 여인의 그런 호의를 보면서 무척 고마워했다. 할머니는 그녀를 볼 때마다 반가움과 즐거움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할머니를 찾아와 다급한 어조로 사정하였다. 그것은 돈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사정을 들어줄 수가 없어 몹시 난처해하셨다. 슬그머니 엿보던 그녀는 얼마 전에 할머니가 무심코 들려 준 돈 이야기를 꺼냈다. 그 돈은 할머니를 지켜줄 매우 중요한 돈이었다. 할머니가 고민에 빠져들자 그럴수록 그녀는 온갖 감언이설로 할머니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녀는 즉석에서 할머니에게 차용증을 써주며 높은 이자를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할머니는 그런 그녀가 설마 어찌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차용증 한 장을 받고 그 돈을 내주었다. 그 후 그녀는 한동안 할머니를 종종 찾아와 청소하며 주변을 정리하는 듯 보였지만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점점 발길이 종종에서 드문드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약속된 날짜에 이자가 시간을 어기며 들어오다가 끝내 그마저 들어오지 않았다. 수상쩍게 여긴 할머니는 그녀를 찾아 나섰다. 그녀는 할머니에게 횡설수설 거리는 말로 변명을 하였다. 할머니는 돈을 돌려달라고 오히려 사정하면서 동시에 엄중한 말도 일러주었다. 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보는 순간 여태껏 지내온 그녀의 따스함은 온데간데없고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다. 얼마 후 그녀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차용증을 갖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드디어 돈을 돌려받는다는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그녀와 단둘이 만났다. 그녀가 할머니에게 차용증을 보자고 하였다. 할머니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곧바로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순간 차용증을 펼쳐 보던 그녀가 차용증을 입속으로 삼켜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한 할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녀에게 차용증을 내놓으라며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간 차용증을 빼앗으려고 하였지만 끝내 차용증은 어둔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차용증이 없으니 빌린 돈도 없다고 하였다. 잠시 후 그녀도 차용증도 돈도 보이지 않았다. 덩그러니 할머니의 눈물만이 남아있었다. 그 뒤로 그들의 결말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있다. 비록 의도된 것이 아닐지라도 쫓기는 자는 부담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서로가 어찌 행동을 해야 할지 난감한 경우를 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행동은 특히 인간성 상실만큼은 서로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왜곡된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잃어버리는 파국만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 누구의 입장을 떠나서 서로를 위한 아름다운 조화가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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