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와 우산
선글라스와 우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06.2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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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나이가 들면서 눈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노안과는 달리, 불편한 것이 눈이 시린 것이다. 그래서 어느덧 선글라스가 필수품이 되었다. 여름철 강한 햇볕에 눈이 많이 괴롭다. 장거리운전이라도 하게 되면 선글라스가 꼭 필요하다. 차에다 두고 다니고 싶지만, 근시가 있어 아무런 선글라스도 쓰지 못하고 도수가 있는 오직 하나의 안경에만 매달린다.

얼마 전 이틀 동안 운동시합이랍시고 야외활동을 해야 했는데, 그 전날까지도 선글라스를 꼭 챙기겠다고 다짐을 해놓고는 막상 새벽에 나가면서 잊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먼저 출발하는 차량에 짐을 실어놓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는 방심이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는데도 아침에도 미처 챙기지 못했다.

우리는 앞에 있는 것은 챙긴다. 그러나 한 발 멀어지면 곧 잊는다. 그러는 대표적인 것이 우산이다. 우산을 들고나갔다가 줄곧 비가 오면 챙기게 되지만, 햇볕이라도 쨍쨍 나버리면 언제 비가 왔느냐는 모양으로 우산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산은 주인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언젠가 지하철 입구에서 일회용 우산을 공짜로 나누어주던 것이 기억난다. 배려심 깊은 아이디어였는데, 여름철 소나기에 다들 우산이 없자 큰 바구니에 꼽아놓고 알아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우산은 지하철 입구에서 나왔을 때 소나기가 끝나고 날이 화창해지자 버리고 간 것을 모은 것이었다. 작지만 깊은 배려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사려 깊은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사려 깊은 것을 넘어 정말로 공동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근처에서 우선을 주워 수선해서 모아놓는 일을 할 정도면 그다지 형편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내 기억으로는 시청역 출구 근처에서 구두를 닦던 분이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시민다운 시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산은 이처럼 쉽게 버리고 쉽게 잊어버리는 물품이었다.

요즘은 비닐우산도 가볍고 재활용성이 높아 함부로 버리지도 않지만 예전에는 대나무에 쉬 찢어지는 얇은 비닐로 되어 있었다. 밖이 잘 보이고, 소리도 우두둑거리는 비닐우산은 나름 매력이 있었지만 그 우산의 운명은 비가 오지 않으면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때 선글라스를 놓고 나온 까닭은 새벽에 나왔기 때문이다. 날은 밝았지만 아직은 어두컴컴한 상황이었기에 이따 낮에 눈이 시릴 것을 까마득히 잊었던 것이다.

하필 그날은 날씨가 좋았다. 밤새 폭우가 지나고 나서 오랜만에 드러난 `맑음'이었다. 쾌청(快晴)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다음날도 날이 맑아 더위가 심했다. 이틀 동안 실외에 머무르면서 얼마나 나의 머리 나쁨을 탓했는지 모른다. 해는 밝지, 살은 따갑지, 눈은 부시지 모자나 푹 눌러쓸 방도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줄곧 물었다. 나도 그런 거 아닌가하고. 남들이 지금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를 떠올리지만, 내가 필요가 없어질 때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 아니겠는가하고.

노자는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을 `추구'(芻狗)라고 했다. 꼴 곧 지푸라기로 만든 개라는 것이다. 제사 때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처럼 성인은 백성을 그렇게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다. 오해는 말자. 이때 가볍다는 표현은 우주적 차원에서 사람은 티끌과 같기 때문에 사랑에 매달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 우리네 삶이 우산과 같다. 비가 그치면 잊는다. 그래, 우리네 삶이 선글라스와 같다. 없으면 불편하지만 벗으면 잊힌다.

/충북대 철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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