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후보자 추첨 탈락 … 가슴 미어져
1985년 이후 만남 2만7000명 불과
“생사확인 ·편지라도 주고 받았으면…”
이산가족이 사라지고 있다.
분단 72년, 6·25전쟁 발발 68년.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혈육과 재회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뜨는 이산가족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런 까닭에서 남북이 판문점 선언을 통해 합의한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하지만 후보자 추첨이 이뤄지면서 메마른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적잖다.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산가족은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에 들어갔다.
“평생의 그리움을 실낱같은 희망 하나로 견뎠건만….”
6·25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평생을 보낸 김관국씨(84·충북지국 이북도민 연합회장)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북녘에 두고 온 가족만 생각하면 미어지는 가슴을 어찌할 길이 없어서다.
평양 순안에 살던 김씨는 1950년 12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평양 일대 원자폭탄이 떨어진다'는 소문에 둘째 누이와 함께 고향 땅을 떠난 게 마지막이었다.
하루 이틀 뒤 따라온다던 부모님과 남은 형제는 이후 영영 볼 수 없었다. 언젠간 만나겠지 하는 희망 하나로 견딘 세월만 어느덧 68년. 지나온 만큼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넉넉지 않다.
“`전쟁이 끝나면 보겠지', `평화가 오면 만날 수 있겠지'. 막연한 희망만 품고 산 세월이 벌써 반백 년이 훌쩍 넘었어. 이제 그리움을 넘어 사무칠 지경이야.”
그런 그에게 8·15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실향과 이산으로 생긴 가슴 속 멍을 지울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결과는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1차 후보 명단에조차 들지 못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전국 이산가족 신청자 5만7000여명을 대상으로 추첨을 진행, 1차 후보자 500명을 가려냈다. 90세 이상 고령자를 50% 배정하고, 직계·형제·자매·3촌 이상 가족 관계 순으로 가중치를 부여했다.
“이산가족 등록을 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뽑힌 적이 없어. 이렇게 안 될 수 있나 싶기도 해. 우리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의 말처럼 상봉하는 이산가족은 극히 소수다. 오죽하면 `천운'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이산가족 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1985년 이후 상봉한 이산가족 수(화상 포함)는 정부·민간 차원 통틀어 2만7000여명에 불과하다. 반면 1988년부터 올해 5월까지 등록된 이산가족은 13만2124명이다. 이 중 7만5234명(57%)은 가족과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충북으로 한정하면 등록 인원이 10년 전(2746명·2008년 5월 말 기준)과 비교해 1000여명 가까이 줄었다. 다시 말해 이산가족 대다수가 가족과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다.
“남은 이산가족을 위해서라도 남북이 통 크게 합의할 시점이 왔어. 상봉이 어렵다면 생사 확인이나 편지라도 주고받게 해야지. 한을 안고 떠날 순 없잖아.”
한반도 평화 훈풍을 타고 극적으로 성사된 이산가족 상봉은 오는 8월 15일 북한 금강산 지역 면회소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 설 기회를 얻는 이산가족은 남북 각 100명뿐이다.
/조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