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궁정가수 된 농부의 아들 연광철
독일 궁정가수 된 농부의 아들 연광철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8.06.26 2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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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김금란 부장(취재3팀)
김금란 부장(취재3팀)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 가난했기에 없다고, 못 배웠다고 손가락질하지 않던 시절 얘기다.

요즘은 어떤가.

개천에서 용을 키울 수도 없고 용이 있다 해도 든든한 배경이 없으면 승천의 꿈조차 품을 수 없다.

집안의 기둥이 되기 위해 가난한 집 자식들이 매달렸던 사법고시가 폐지되면서 일명 `사(士)'자 들어가는 판사, 검사, 변호사를 만들려면 수천만 원 학비를 감당해야 하는 로스쿨을 졸업시켜야 하는 데 쉬운 일은 아니다.

돈이 권력이자 사회적 지위로 통하는 사회에서 다음 달 독일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으로부터 캄머쟁어(최고의 예술가에게 독일이 공식 부여하는 칭호) 호칭을 받을 성악가 연광철씨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연광철씨는 누구인가.

충주공고와 청주대 음대를 졸업해 성악계에선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돈 많은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명문학교 졸업장도 없다. 속물적인 잣대로 보면 그는 성공할 조건 하나 없는 일명 루저다.

충북 충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년시절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일찍 돈벌이를 하고 싶어 충주공고로 진학했고 남들 다 따는 자격증 시험에서도 실패했다. 자신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 속성으로 기본기를 익혀 청주대 음악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선배는 그에게 “넌 소리가 좋기는 한데, 우리 학교를 나와선 안돼. 성공을 하고 싶으면 서울에 있는 음대에 가라. 그래야 한국에서 행세할 수 있다”며 현실적인 충고를 했다.

대학 졸업 후 700달러를 들고 불가리아 소피아음대로 유학을 떠난 그는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순위없이 4명이 공동 우승하는 결선에 입상하면서 화려한 성악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2009년엔 지방대 출신으로선 이례적으로 서울대 교수로 임용돼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연광철씨는 집안도 학벌도 아닌 오직 실력으로 유럽 무대에서 최고의 성악가로 성공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연광철 씨가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다면 과연 그의 진가를 발휘했을까?

독일 음악평론계의 황제라 불리는 요아힘 카이저로부터 `바그너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았던 연광철 씨의 목소리는 유럽무대라서 통했을 것이다.

지방대를 지잡대(지방에 소재하는 잡스러운 대학을 뜻하는 속어)로 부르는 교수가 버젓이 강단에 서고, 배경없는 집안의 자녀를 흙 수저로, 기회균등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한 지방 출신 학생을 벌레에 비유해 지균충으로 부르는 우리 사회에서 학벌의 벽은 끊기 힘든 족쇄다.

실력이 뒷전인 사례는 부지기수다.

최근 대검찰청 반부패부는 전국 시중은행 6곳의 채용비리에 대해 8개월간 수사한 결과 시중은행장 등 38명을 재판에 넘겼다. 일부 은행은 청탁이 있는 경우 관행으로 서류면접을 통과시켜주었고, 은행장의 특별 지시가 있는 지원자는 중점적으로 관리해 불합격 대상을 합격자로 변경했다. 또한 사전에 남녀 채용비율을 정해놓고 여성지원자의 점수는 낮추고 남성지원자의 점수는 올리는 수법으로 남녀 합격자 수를 조작하거나 상위권 대학 출신을 선발하기 위해 합격대상인 다른 지원자의 점수를 낮춰 탈락시킨 사실도 드러났다.

제2의 연광철을 꿈꾸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오늘도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다. 실력만으로도 충분히 통하는 사회라는 믿음을 안고. 제발 그 믿음이 깨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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