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먼저 꽃 피어
나 먼저 꽃 피어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8.06.26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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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풀들이 바람에 몸을 숙인다. 바람 부는 쪽을 향하여 일제히 물결 친다. 내 가슴까지 오도록 키워온 풀들의 기세가 등등하다. 바람과 맞서지 않아야 꺾이지 않고 살아남는 생존법을 질긴 생명력으로 보아 터득했을 터이다.

처음에는 명아주가 우뚝 솟았다. 그에 질세라 망초대가 뒤를 잇는다. 조금씩 장악하더니 이제는 제 터 인양 풀밭이 되었다. 밖을 내다보면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밭에서 조동화의 시를 낚는다.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시구가 길을 건너와 박힌다.

밭은 우체국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건너편에 눈길이 가는 그곳이 숲이 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앞집에서 세워둔 농기계의 본래의 모습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 반쯤 풀에 잠겨 바다에 떠있는 돛단배 같다. 이렇게 풀들은 주인 할머니의 부재를 말해주고 있다.

이 밭은 구순이 넘으신 할머니가 농사를 짓던 땅이다. 고추와 파가 심겨진 밭은 매끈했다. 풀이 얼씬 못하도록 김을 자주 매었고 고추대도 세워 반듯했다. 부지런함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던 밭이다. 할머니가 작년 겨울에 돌아가시면서 자제들이 팔아버렸다. 동네에서 사서 공원을 만들 계획이었다. 공사를 시작하려고 하니 밭에 심겨진 나무가 말썽이었다.

호두나무로 수령이 몇십 년 되어 보인다.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던 나무다. 지나던 사람이 호두를 딸라치면 혼쭐을 내셨다. 동네에서는 나무 값을 치러야 일을 진행할 수 있는데 할머니의 아들 둘이서 다투고 있는 바람에 해결을 못 하고 있다고 한다. 서로 자기 것이라고 양보를 하지 않는 사이에 숲이 된 것이다.

어이없는 싸움에 풀들이 제 세상을 만났다. 얼마나 큰 값이 나가서 싸우기까지 하는지 궁금했다.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든 금액은 사십만원이었다. 풀밭을 보고 있을 때만큼이나 씁쓸하다. 사람마다 형제들이 입방아에 오른다. 형에게 양보하지라는 사람과 동생 주면 안되냐는 상반된 의견이 오간다. 싸울 것 없이 반씩 가지라는 원칙을 내세우는 이들도 있다.

나무 한 그루를 두고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형제를 보면서 나는 또 한편의 동화가 떠올려진다. 서로 상대의 볏단에 자기의 볏단을 나르던 의좋은 형제가 그려진다. 아래 사람으로서 윗사람에게 욕심을 포기해야 하고 윗사람은 너그러이 내어줄 줄 알아야 하건만 그리 안 되는 게 사람이다. 형제간의 우애가 좋은 집을 보기가 드무니 말이다.

건너에서 지켜만 보던 나무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 거기에 늘 있어왔던 나무였기에 자세히 본 적이 없다. 한 그루려니 했는데 몸통이 둘이다. 같은 뿌리에서 두 개의 나무가 자라난 연리목인 듯하다. 형제간의 불화(不和)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현답을 내리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생전 밭이나 나무에게 관심이 없었던 그들을 만나면 이 말을 들려주리라. 둘이 대립하지 말고 하나씩 나누라는 나무의 암시를. 야박한 우애를 탓하기 싫어 차라리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는 속담으로 읽어도 마음의 허허로움은 가시질 않고 있다.

내가 웃어 보이면 상대도 웃어주기 마련이다. 화해란 자존심을 수그리고 용기를 내는 사람만이 얻는 평화다. 웃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 보아야 한다. 누구라도 먼저 웃어 따라 웃으면 무표정의 얼굴이 꽃으로 피어날 텐데. 그러면 마음에 꽃밭이 생기련만.

어차피 피어날 꽃이라면 내가 먼저 필 일이다. 내가 피어 너도 핀다면 꾸물대지 말고 서두를 일이다. 그리하여 온통 꽃밭이 되면 풀이던 망초대도 꽃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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