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인권센터 개소를 축하하며
충북인권센터 개소를 축하하며
  • 음명희 인권교육원 사유너머의 사람들
  • 승인 2018.06.2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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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명희 인권교육원 사유너머의 사람들
음명희 인권교육원 사유너머의 사람들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의 저자 스탠리코어는 인권운동을 사실-진상규명-처벌과 제재-재발방지라는 단선적 공식을 넘어 인권침해와 인간 고통의 현실을 부인하지 말고 시인하는 것을 근본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권과 인도적 가치를 시인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인간양성을 성취하기 위한 교육을 인권운동의 제1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사전적 의미의 공감이란, 타인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느낌 또는 기분을 의미하지만 인권에서 말하는 공감은 고통으로 인한 타인의 느낌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스탠리코어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양성'이 인권운동의 제1의 사명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권침해와 인간의 고통을 가중하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완고한 `부인'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부인'하는 것을 용기 있게 `부정'할 수 있는, 마음 만으로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공감 즉 `공감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위로서의 `공감함'이란 무엇으로 가능한가?

일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볼 수 있는 힘, 사소한 것을 관찰할 수 있는 힘, 자기 손가락 끝에 박힌 작은 가시의 불편과 아픔을 돌봄과 동시에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감각의 촉을 여는 힘, 행위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 사물과 현상에 대한 체험을 이성보다 오감을 통해서 생생하게 하는 힘, 일상화된 감각의 틀을 깨고 자동화된 인식을 일깨우는 힘을 감수성이라 한다면 `공감함'은 감수성의 회복으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감수성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자기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다. 하나는 `나는 오류를 가진 사람이다'라는 자기 성찰적 인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감수성은 닫히게 되고, 신화가 되어버린 신념으로 세상의 다름을 보고 타인을 악마화 한다. 결과는 무서울 만큼 폭력적이다.

`충북도 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고 5년 만에 충북인권센터가 개소를 한다. 막바지 몇 의원들의 괴상하고 희한한 발상으로 조례 폐지와 센터 개소에 위기가 있었지만 지역의 인권단체와 도민들의 관심으로 막을 수 있었다.(인권조례 폐지가 상정되었다가 취하된 사례는 충북이 처음이라고 한다.) 앞으로 많은 고민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될 테지만 도민들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을 부인하지 않는 `공감함'과 자기 성찰 그리고 사유의 감수성이 일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센터가 되길 바란다. 사건과 사고로 인권을 말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의미와 그 속의 사람을 말하길 바란다. 개인의 경험이 집단의 행위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어 우리의 일상화되고 자동화된 인식을 일깨울 수 있는 인권을 말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의 `타인의 고통에 대한 나의 공감함'과 `나의 행위를 되돌아보는 성찰'그리고 `다름에 대한 나의 사유'가 크게 일어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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