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계절
장미의 계절
  •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 승인 2018.06.1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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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유월이다. 한낮의 후끈한 열기가 한줄기 소나기를 부르는데 담장 너머 장미가 선혈처럼 붉다. 장미는 오월부터 피기 시작하지만, 유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정한을 드러내듯 제 색깔로 타오른다. 그들의 선명한 붉은빛에는 스스로 가눌 수 없을 만큼의 뜨거운 열정과 되돌아가지 못하는 순정이 향기보다 진하게 배어 있다. 그래서 장미 꽃다발은 마음을 담아 보낼 수 있는 편지가 되고 엽서도 된다. 굳이 예쁜 글씨로 쓴 메모지를 꽃 사이에 숨겨둘 필요도 없다. 꽃을 받는 사람이 이심전심으로 그 뜻 헤아려주길 바랄 뿐.

유월이 되면 장미 몇 송이를 들고 국립현충원을 찾는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잠들어 있는 동료 조종사들이 있다. 고인이 잠든 묘지에 빨간 장미를 들고 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자리가 아닌데도 붉은 장미를 묘비 앞에 놓고 싶은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하늘에 피는 장미, 빨간마후라였다. 묘비 뒷면에 “ㅇㅇ상공에서 순직”이라고 명시된 그들의 생은 서러울 만큼 짧았다. 꽃 같은 나이에 꽃이 떨어지듯 어느 날 갑자기 산화散華했다. 살아있다면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겠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젊디젊은 모습이다. 피가 끓는 시절에 멈추어 버린 그들 삶 앞에 서면 이순의 나이인 나도 그들과 똑같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다. 그때를 생각하면 재밌고 즐거웠던 기억마저도 저릿하다. 유월이 오면 그 저릿한 아픔이 습관처럼, 운명처럼 내 속에서 꼼지락거린다. 그렇다고 그곳을 찾는 이유가 고인과의 의리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평생토록 누구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은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지만 내 인생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도 2학년 시절, 현충일을 맞이하여 동기생 몇 명과 처음으로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을 때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묘역에서 절규하는 하얀 소복차림의 중년 여인을 만났다. 얼마 전 불의의 비행사고로 묘지석이 되어버린 아들을 쓰다듬으며 우는 어머니였다. 순직조종사는 생전의 모습이 생생한 선배님이었고, 이제 막 임관한 `소위'였다. 어머니는 생도 제복을 입은 우리의 손을 붙들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날 비로소 내가 군인의 길을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분이 어쩌면 내 어머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다가왔다.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군인에 대해, 죽음에 대해 긴 일기를 썼다.

그 후 40년의 세월이 지났다. 다행히 치명적 불운이나 커다란 실수 없이 조종사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5명의 사관학교 졸업동기생을 비행사고로 먼저 보내야 했고, 부하조종사 두 명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지금은 우수한 장비와 훌륭한 관리체계가 갖추어져 비행사고가 쉽게 발생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해마다 몇 차례씩 주변의 선·후배 조종사들을 하늘에 묻어야 했다. 아버지가 비행사고로 인해 순직하였는데 아들마저 전투조종사가 되었다가 하늘의 별이 된 경우도 지켜보았다. 추락하는 비행기가 민가에 피해를 줄까 봐 끝까지 비상탈출을 미루었던 후배 조종사도 있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공군의 전투력과 발전된 사고예방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 살아남은 조종사들에게 희생과 봉사의 군인정신을 일깨워주었다. 군인이 명예로울 수 있는 것은 죽음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윤숙 시인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제목의 긴 시를 남겼다. 그분의 말씀처럼 누구나 국립현충원에 가면 먼저 가신 호국영령들이 말을 걸어온다. 그들의 묘비에 서려 있는 수많은 이야기와 애틋한 사연들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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