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초여름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06.1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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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울긋불긋한 꽃의 빛깔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녹색의 나뭇잎 빛깔들이 산을 뒤덮으면, 본격적으로 여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름이라고 해서 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짓수로만 보면 봄꽃보다 여름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여름을 꽃의 계절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여름의 지배적인 빛깔은 초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뭇잎과 풀은 그 초록 빛깔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꽃이 진 자리에 돋은 열매도 초록색 물결에 일조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곽예(郭預)는 여름의 초록 물결이 주는 감흥에 젖어 더위 따위는 아예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초여름(初夏)

千枝紅卷初均(천지홍권녹초균온) 가지마다 꽃이 지자 신록이 막 퍼지고
試指靑梅感物新(시지청매감물신) 푸른 매실에 손 대어보니 감흥이 새롭네
困睡只應消晝永(곤수지응소주영) 긴 낮 보내기는 곤한 잠이 제격인데
不堪黃鳥喚人頻(불감황조환인빈) 꾀꼬리 자주 울어대니 잠들지 못 하네

시인의 거처는 온갖 나무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인 듯하다. 이곳에도 여름이 찾아온 것을 시인은 어떻게 알아챘을까? 바로 거처 주변의 사물들이 부지불식간에 여름 모드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고서이다. 나뭇가지마다 습관처럼 달려 있던 붉은 꽃들을 누군가 두루마리로 말아 벽장 속에 집어넣고는 그 자리에다 초록 물을 골고루 들여놓은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시인의 거처에도 여름이 성큼 와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여름이 온 것을 눈으로 보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듯하다. 마침 주변에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 전에 보이지 않던 매실이 풋풋한 푸른 자태를 뽐내며 열려 있었다. 시인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대보았다. 전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이 과연 여름이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여름을 확인한 시인은 여름을 본격적으로 즐겨볼 요량이었다. 여름 하면 낮잠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시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름 긴긴 낮에 피곤한 몸을 달래는 데는 낮잠만 한 것이 없으리라. 그래서 시인도 낮잠을 청해 보았지만, 선뜻 잠이 들지 않았다. 몸이 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훼방꾼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여름 새인 꾀꼬리가 시도 때도 없이 시인을 불러 깨웠기 때문이다. 청각으로도 여름인 것을 말하는 시인의 솜씨가 참으로 절묘하다.

봄이 간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여름이 온 것을 못 마땅해할 일은 전혀 아니다. 여름은 여름다운 맛과 멋이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 즐기면 된다. 파랗게 달린 매실을 만져보고 평상 마루에 누워 낮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여름을 즐긴다면, 꾀꼬리가 기꺼이 고운 노래로 화답할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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