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향전(2)
옥천 향전(2)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6.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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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선- 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영남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서울로 향하던 여러 고갯길이 많다. 그 중 충북 남부 3군은 영남과 금강 물길로 통한다. 6백여 년 전 이곳은 경상도 땅이었다. 백두대간 서쪽 금강 수계 상당 부분이 경상도 땅인 이유다. 자연스레 이곳과 영남은 학연과 혈연으로 맞닿았다. 1413년 이전 옥천과 황간은 경상도 경산(성주) 땅이었고, 보은, 영동, 청산은 상주에 속했다. 다소 복잡한 양상은 통일신라의 9주(州)에서 기원하며, 신라군의 북진 루트와 관련 있어 보인다.

사실 옥천은 다른 곳과 달리 군수가 파견된 나름 큰 고을이었다. 고려 때 있던 세 곳의 현을 조선시대 들어 합치고, 1914년 청산현마저 합치니 역사의 두께가 두텁다. 또한 임진왜란 순절 충신, 중봉 조헌이 묻힌 곳이니 그 의미가 남달랐다. 게다가 `그'가 태어난 고향이다. 지금도 조헌의 자취에 남긴 문화유산이 여럿이다. 낙향하여 살던 집터와 후학을 기르던 강학의 공간, 그리고 추념의 장소 등 다양하다. 조선 후기를 관통한 춘추대의와 대명의리의 상징과도 같은 조헌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조헌을 제사지내던 서원과 사당이 여럿 들어서면서 이를 통해 향권을 장악하려던 노력은 충청도, 호서지역의 향전(鄕戰)을 대표한다.

많은 향전이 선현의 위패를 모셔 제사지내고 학문을 닦던 서원으로부터 시작한다. 처음 조헌의 위패를 모신 서원은 삼계서원(三溪書院)이다. 삼계서원의 모태는 1571년 옥천 출신 전팽령(全彭齡)과 곽시(郭詩)를 모신 쌍봉서원이다. 쌍봉서원이 임진왜란 때 불타자 1621년 삼계서원으로 다시 세웠다.

그런데 이때 조헌을 함께 모시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조헌의 위판을 전팽령과 곽시 아래에 두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먼저인가, 도학과 절의가 먼저인가를 두고 다퉜다. 조헌을 아래에 둘 수 없었던 서인은 1639년 조헌의 위패를 빼내 이미 조헌 사당으로 세운 표충사에 묻었다. 그리고 삼계서원의 제향 인물을 공격해 결국 1657년 훼철하고 말았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권력을 장악한 서인은 삼계서원을 세운 이들이 북인이며, 서원에 모셔진 두 인물의 자질을 문제 삼았다. 서인이 북인에게 붙인 낙인은 폐모론(廢母論)이었다.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서인으로 강등한 일을 내세웠다. 삼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이들이 폐모론에 앞장선 한찬남, 유희분의 무리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삼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이들은 조헌 의병진에 참여했거나 그 후예들이다. 정립은 직접 의병에 참여했고, 이시립은 의병 이충범(李忠範)의 아들이다. 전팽령의 외손이 정립이고, 곽시는 이충범의 친구라고 한다. 실제 조헌 의병진에는 같은 옥천 출신 인물이 대거 참여했다. 조헌 의병진은 당시 당색과는 무관했으나, 삼계서원 건립으로 이들은 북인으로 낙인 찍혔다. 물론 `그'의 외할아버지 곽자방도 금산 순절인의 하나이다.

삼계서원의 위차 논란은 1639년 충청감사 김육(堉)이 조헌의 위패를 표충사로 옮기며 가라앉는 듯했으나 결국 훼철되고 말았다. 그러나 후손들은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다시 상소를 올려, 1675년 삼양서원으로 이름을 바꿔 재건했다. 삼양서원은 전팽령과 남시, 그리고 남인 정구(鄭逑)를 더해 중건을 추진했다. 지역 북인계 인물들이 권력을 차지한 중앙 남인과 연결을 도모한 것이다. 동시에 옥천 지역 서인들은 `그'를 포함한 서인 중진과 힘을 합쳐 삼양서원 건립을 반대했다. 이때 내세운 명분이 `폐모론'이니 광해군 때 북인들의 약점을 물고 늘어진 셈이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는 소과에 합격한 후 인목대비에게 문안을 드린 의리의 인물로 거듭 강조됐다.

선산곽씨 내부의 분열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당초 삼계서원을 세울 때 이때 곽현(郭鉉)과 송갑조는 곽은(郭垠)을 함께 모시자고 주장했다. 곽은은 곽시의 할아버지다. 곽현은 서원 건립을 주도한 정립의 매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헌의 문인이었던 김약의 조헌 위패 탈취사건으로 결국 곽은 추향은 어렵게 되었다. 결국 삼양서원마저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1680년 훼철됐다. 여기에 삼양서원에 귀속된 토지가 창주서원에 분급되면서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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