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를 말한다, 로버트 카파
사진가를 말한다, 로버트 카파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8.06.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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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종군 사진기자들은 그의 손안에 자신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이 군마에 혹은 저 군마에 실을 수 있으며, 최후 순간에 자기 호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을 수도 있다.”

인간의 인내하는 능력과, 극복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진가 로버트 카파. 그는 1913년10월2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모험심이 강하고 열정과 추진력이 뛰어난 그는 17세에 파시스트적이고 반 유대적인 헝가리정부를 떠났고,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정착했다.

헝가리에서 좌익학생운동을 했던 그는 베를린의 정치대학에 입학했고, 언론분야 경력을 위해 데포트통신사에서 암실조수겸 사환으로 일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정부의 총통이 되자 그는 파시즘을 피해 도망 온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있는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는 파리에서 프리랜서사진가로 어렵게 생활하면서 카메라를 저당 잡히는 등 좌절을 맛보면서 살았다.

출생 당시 앙드레 프리드만이었던 그는 로버트 카파로 이름을 바꾸고 1936년 좌익진보동맹에 힘을 실어준 프랑스선거와 연좌농성 등 많은 장면을 취재했다. 스페인내전이 일어나자 그는 바르셀로나, 아라곤전방, 마드리드, 톨레도 등을 돌아다녔고 10월초 코르도바전방에서 `쓰러지는 병사' `병사의 죽음'을 찍었다. 두 사진은 참호에서 뛰쳐나와 총을 든 채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공화군의 병사 페데리코 갈시아의 죽음이다.

이 사진이 `그의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여 쓰러지는 순간의 공화군의 한 병사'라는 제목으로 라이프지에 실리면서 그는 저명인사로 떠올랐다. 후에 사진에 대한 진실성 여부의 논란이 있었지만, 그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금 마드리드군사문서보관소의 사실확인 이후로 그는 전설의 사진을 찍은 사진가로 알려졌다.

그는 1938년 중일전쟁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때 다큐멘터리 영화 `4억의 민중'에 촬영조감독으로 참여하여 일본군의 공격으로 불타는 고통의 모습들을 촬영했다. 또 1943년 튀니지와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취재했고 1944년6월6일 미군작전부대와 노르망디 오마하해변에 상륙하여 노르망디를 통과하고 프랑스 파리로 진격하는 미군부대를 따라갔으며, 벨기에 바스토뉴남쪽 아르덴지역전투를 카메라에 담았다.

수많은 전쟁터에서의 그의 사진촬영이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그는 라이프지의 의뢰를 받아 프랑스에 대항하는 베트남독립운동 취재를 위해 베트남에서 1개월간 지냈는데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고했다. 5월 25일 그는 카메라와 필름, 술병과 냉차병을 휴대하고 지프에 몸을 실었다.

그의 동료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올 것이라고 말한 그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 뒤쪽에서 프랑스 대포 탱크 박격포가, 왼쪽에서의 소총, 오른쪽에서 뒤섞인 프랑스포탄과 소총 소리로 인한 아비규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촬영을 감행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후 또 다른 각도에서의 촬영을 위해 몸을 움직이다가 대인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가 잘리고 흉부가 파열된 채로 카메라 끈을 쥔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결국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다.

21세기 최고의 사진가인 그는 다섯개의 전쟁을 종군 취재했지만 짧은 인생 동안 전쟁의 부당함을 규탄하고, 인간의 모든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노력했다. 그는 전쟁종군사진가이면서 당대 최고의 문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스타인벡과 호형호제할 정도였으며 화가 파블로 피카소, 게리 쿠퍼와도 친분이 가까웠다.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말은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다.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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