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싸움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8.05.30 2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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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의 시 읽는 세상

 

이 상 국

여러 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정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판 싸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칡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여름으로 치달으면서 숲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갑니다. 연둣빛을 거두고 초록이 장악하고 있는 숲을 살짝 들여다보면 치열한 경합이 벌어집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착착 엉겨붙는 넝쿨, 한 줌 햇볕이라도 더 받기 위해 위로 가지를 뻗는 나무들, 높이로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땅에 납작 엎드려 자라는 땅빈대 등등. 번식을 위한 목숨 건 한판 싸움이 벌어집니다. 요즘 정치판과 다를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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