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옥천 향전(1)
10. 옥천 향전(1)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5.2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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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조헌(趙憲)은 고향 김포가 아닌 옥천에 묻혔다. 금산전투 후 동생 조범과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옥천에 안장했다. 조헌이 옥천에 묻히며 그를 내세워 지역을 장악하려는 세력과 토착 문중 세력 간의 갈등, 호서지역을 대표하는 향전(鄕戰)이 벌어진다. 동인이 우세하던 옥천에 서인을 대표하는 조헌이 묻혔으니 당쟁의 시대에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향전은 신분제의 해체에도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던 구향(舊鄕)과 새로이 부(富)를 획득해 양반으로 상승한 신향(新鄕)의 다툼을 말한다.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다투던 조선 후기의 지역 내 갈등이다. 과거 양반 세력이 미약했던 지역에서 흔히 벌어진 일이지만, 영남과 호서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하지만 호서지역은 신향이라 부를 만한 신흥 양반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의 향전은 문중의 우열 다툼에 당쟁이 더해지면서 치열한 향권 쟁탈전이라 펼쳐졌다.

한편 영남지역의 경우 향전을 통해 동인-남인이 우세하던 전통적인 권위가 뒤바뀐 경우가 속출했다. . 토착 영남 출신이 다시 권력을 잡은 것은 한참을 지나 조선시대 동인-남인 집권기 몇십 년에 불과하다. 역사는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개천에서 용 난, 군인 출신 대통령을 거듭 배출하면서 지역은 급격히 우경화되었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일부 군인들의 항명으로 촉발된 운요호사건을 처리하며 강화도조약을 맺고,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겼던 일제 지한파(知韓派) 관료들의 행태가 떠오른다.

역사의 자취를 쫓아가면 이곳 영남 지역에 서인-노론계 서원을 여럿 찾을 수 있다. 양반의 책무를 다한 경주 최부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붕당정치가 격화되자 서인-노론계는 동인-남인의 근거지인 영남 지역에 자기 세력을 키우려 노력했다. 곧 서인-노론 인물을 모시는 서원을 세우려 했다. .또 경주에도 송시열의 영당을 세우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들 지역은 영남을 대표하는 고을로, 서인-노론을 대표하는 인물을 모시는 서원을 세워 자파 세력을 키울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남인 내부의 분열에 적극 개입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퇴계 이황 아래 김성일과 유성룡 중 누구를 위에 두는가 하는 문제로 남인이 크게 갈렸다. 문중 간의 갈등이 커지며 점차 관청의 결정에 의지하려 했고, 중앙에서도 논란을 빚었다. 이런 갈등을 조정했던 예조가 어떤 판결을 하느냐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는 만큼 치열한 여론전을 전개했다. 정권을 차지하고 있던 노론은 갈등을 적절히 이용하며, 철옹성과 같던 영남 지역에 노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웃 갈등을 중앙 정치세력에 의지하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판결에 불복한 무리는 노론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향전을 통해 전통세력이 뒤바뀐 역사 경험은 해방 후에도 반복된다. 빈농의 아들을 자처한 군인 출신 대통령의 `영도'아래 이 지역 고시출신 고급 관료와 산업화 세력의 결집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확연한 출세의 길에 토호가 가세하면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진영이나 해방 후 새로운 국가건설 세력은 입지가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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