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과 인내의 여정 준비하자
설득과 인내의 여정 준비하자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5.20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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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봄 햇볕처럼 따스했던 남북관계가 급랭했다. `일장춘몽'을 우려하는 소리도 들린다. 북한은 지난 16일 자신들이 제안한 남북 고위급회담을 한나절 만에 일방 취소했다. 다음 날에는 한발 더 나가 남한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북남 고위급회담을 중지시킨 엄중한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남조선 정권과 다시 마주앉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엄중한 사태'란 한·미가 공동 시행하는 군사훈련인 `맥스선더'와 얼마 전 국회에서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가 한 발언을 의미한다.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비핵화가 리비아 모델이 되는 것에 반대한다”며 북·미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일에는 지난 2016년 중국 소재 북한 식당에서 일하다 집단 탈북한 여종업원들의 조속한 송환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의 탈북이 자유의사가 아니라 지난 정부의 기획과 공작에 의해 이뤄졌다는 의혹이 국내서 제기되고 나서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과정을 취재할 우리 측 기자단의 명단 접수도 거부했다. 설상가상으로 북한 주민 2명이 귀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태 전 공사는 “김 위원장이 핵을 내려놓을 리 없다”며 김정은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수시로 피력했다. 김 위원장이 자라양식공장을 방문해 새끼 자라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공장 지배인을 질책한 뒤 즉결 총살에 처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김 위원장이 불쾌하게 들을 수는 있겠지만 한반도 평화라는 대의제를 훼손할 수준의 사유로 보기는 어렵다. 우리가 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대화하듯 북도 태 전 공사의 입을 막을 수 없는 우리의 체제를 인정한다면 이렇게 격분할 일은 아니다. `맥스선더'도 이미 예정됐던 연례행사였던 만큼 유감 표명에 그쳤어야 했다.

북한의 태도 급변을 중재자인 남한과 협상 당사자인 미국을 압박해 북미회담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는 전략으로 보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발언의 수준과 조치의 강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북의 일방적 행보에 대응할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우리의 처지가 답답하기도 하다. 이번에 북의 태도에서 재확인된 것은 한반도가 평화로 가는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북과 같은 방식의 대응을 자제하고 인내하며 그들을 달래고 설득하는 고된 여정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리비아 모델을 수시로 언급하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을 북이 비난한 대목에서는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이 옳다. 리비아 지도자 가다피는 미국과 선(先)폐기 후(後)보상을 골자로 협상한 후 일사천리로 밀어붙여 불과 1년 10개월 만인 2005년 11월 완전 폐기를 선언했다. 핵 시설은 물론 개발 프로그램까지 미국에 실어 보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리비아는 미국과의 국교를 복원하고 국제 제재가 풀려 파탄났던 경제가 훈풍을 탔지만, 가다피 정권은 2011년 이른바 `아랍의 봄'을 맞아 종말을 고했다. 반정부 시위가 리비아 전역으로 번지자 UN은 다국적군을 보내 정부군을 공습하며 시민군을 지원했다. 가다피는 시민군에 살해됐다. 북한은 리비아가 핵 폐기에 합의하고 완벽하게 실천했음에도 미국이 체제 붕괴를 방조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또 리비아가 핵을 계속 유지했다면 다국적군이 함부로 내전에 개입해 정부군을 공격했겠느냐는 판단도 할 것이다. 대외적으로 체제 수호의 유일한 카드나 다름없는 핵을 포기해야 하는 김정은 입장에서 리비아식 시나리오는 악몽에 다름없을 것이다.

더욱이 리비아는 핵물질을 생산하기도 전인 초기 개발 단계에서 폐기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두자릿수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궤도에 올려 핵전력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기해야 할 핵전력 가치가 당시 리비아와는 천양지차라는 얘기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 조율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다. 북의 몽니로 머리가 복잡해진 만큼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 걱정없는 한반도를 갈구하는 국민의 염원을 되새기며 힘과 지혜를 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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