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역식
퇴역식
  •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 승인 2018.05.1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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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화창한 봄날에 임무를 모두 마치고 역사 속으로 물러가는 퇴역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주인공은 그동안 수많은 조종사를 훈련시켰던 비행기. T-103이라 불리는 이 훈련기는 새로이 임무를 담당하게 될 후속 비행기와 편대비행으로 평소에 누비던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착륙했다. 마지막 발자취를 뚜렷하게 남긴다는 의미였을까? 착륙 전 붉은 연막을 하늘에 길게 뿌리며 활주로를 향해 들어왔다.

행사장에 모인 조종사들과 정비사, 비행을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큰 박수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했다. 그리고 비행기의 심장인 엔진 앞에 커다란 화환을 걸어주고 샴페인을 터뜨려 뿌려주며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주인공은 그동안 수천 명의 학생조종사를 훈련시켰고 총 6만여 비행시간을 남겼다.

공군 조종사이면 누구나 주인공에게 아련하면서도 특별한 감회를 가지고 있다. 꿈에 그리던 조종사의 길에서 맨 처음 만났던 비행기. 그 첫사랑 같은 인연이 자신만의 애틋한 색깔로 기억되어 있다. 사실 조종사가 되기 위한 첫 날갯짓은 고행의 길이다. 이제 막 고삐를 맨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비행기를 얌전하게 길들이는 일은 숱한 번민과 자책을 동반한다. 첫사랑을 통해 사람들이 삶과 사랑의 실체를 알아가듯 조종사들은 그 과정을 통해 비행의 난해함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어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공군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선배 조종사들로부터 지금까지 조종사들은 비행기를 단순한 기계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행기와 조종사는 한 몸'이라는 `기인동체(機人同體)'의 정신은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상징한다. 그 정신을 통해 비행 중 생기는 사소한 이상이라도 내 몸 어딘가가 아픈 것처럼 미세한 떨림으로 알려줄 것이라 믿는다. 4000여 시간을 비행하면서 실제 그러한 상황을 몇 차례 경험했다. 언젠가 엔진에 약간의 진동이 느껴져 재빨리 귀환했는데 엔진 속을 들여다본 정비사의 말로는 정말 아슬아슬하였단다. 조금만 늦었어도 무사히 귀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비행기에 대한 애착은 정비사도 마찬가지다. 잘 정비하여 비행을 내보냈는데 귀환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사고가 나면 정비사는 소중한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픔에 빠진다. 2005년 내가 근무했던 비행단에서 추락사고가 났을 때, 담당정비사는 며칠 동안 출근하지 못했다. 그 비행기가 서 있던 격납고를 바라보기도 힘들었단다. 그래서 비행기의 퇴임식은 친한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제 할 일을 다 마쳤으니 오늘의 주인공도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사람의 일생과 비슷하다. 항공박물관에 가면 옛날에 내가 조종하던 여러 비행기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비록 더 날지 못하지만 버려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할 일을 마치고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에게 역사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임무를 띤 것이다. 아마 오늘의 주인공도 일부 몇 대는 그 길을 갈 것이다.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예로부터 내려온 삶의 지혜였다. 우리의 조상은 큰 바위나 나무, 심지어 공동우물이나 집안의 화장실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었다. 현대의 과학적 시각으로 보면 미신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행사가 끝날 때쯤 기념사를 하게 된 전대장은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의 따뜻한 젖가슴은 자연스레 동생에게 넘겨지듯 새로운 비행기에 사랑을 넘겨주자고 당부했다. 새 엔진에 깔끔해진 조종석, 더 좋은 성능을 가진 비행기이지만 딱딱한 새 신발을 처음 신었을 때처럼 아직은 푸근하지 않고 어색하다. 내가 비행기에 길드는 것인지, 비행기가 나에게 길드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차차 익숙해지면서 정이 들 것이다. 비록 인간이 만든 기계에 지나지 않지만 생사고락을 함께하기에 비행기에 대한 조종사들의 정에는 남모르는 애틋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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