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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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05.1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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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공중파는 안테나만 있으면 공중에서 잡아볼 수 있는 방송이기 때문에 공중파라고 부른다. 안테나만으로는 안 되고 케이블로 송출해주는 방송은 선이 있기 때문에 유선방송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공중파가 일반적인 이름이었는데 위성방송이 나오면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지상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케이블 tv라는 것도 있었다. 공중파가 잘 잡히지 않는 지역에 방송을 유선으로 보내주기 위한 것으로 일반적으로는 지역방송이었다. 초장기에는 비디오를 틀어주다가, 조금씩 지역 뉴스를 맡는 역할도 했다. 그러다가는 광고를 송출하기도 했다.

위의 이야기는 송출방식에 의한 분류라면, 제작주체나 제작내용에 의한 분류도 있다. 국영방송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공영방송도 있고, 민간방송도 있다. 독재시절에는 정부를 대변하는 공영방송 뉴스는 인기가 없어 민간방송 뉴스가 여론을 이끌었다. 민간방송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거 정치인으로 영입된 것만 봐도 그 인기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되면서 오히려 민간방송 뉴스가 웬일인지 시들시들해져 인기가 하락했다. 돈이 없어서 그런지, 주제를 못 잡아서 그런지, 요즘은 뉴스하면 공영방송이 대세다. 마치 영국이나 일본의 공영방송의 좋은 전철을 이어받는 것 같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하면, 일본은 아직도 수신료를 받는다. 하루키 소설 `1Q 84'에 징수원을 하나의 소재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그랬다. 텔레비전 안 본다, 없다, 뭐다 하면서 수신료 안 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공영방송의 역할을 못한다고 `수신료 거부운동'이 벌어졌고, 국민입장에서야 운동도 의미 있고 돈도 안내니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는데, 이후 꼼수인지 전기료 안에 수신료가 포함되어 마치 돈을 안 내는 것 같지만 분명 전기료를 내는 사람은 꼬박꼬박 내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수신료 중의 얼마는 교육방송에 때준다나 뭐라나.

제작주체를 살짝 벗어나서 제작내용으로 나눈 것이 `종합편성'이라는 것이었다. 요즘 쓰는 종편이라는 말이 그것인데, 그 분류법은 주체와 내용이 뒤섞여있어 분류하기 쉽지 않다. 왜냐면 종편의 주체가 대부분 대규모 언론사이었기 때문이다. 뉴스만을 한다는 방송은 제작내용에서 그 독자성을 인정받고, 광고만을 하는 방송은 홈쇼핑으로 그 역할만을 하는데, 이것저것 다하겠다는 것이니 종합편성이었다.

현실적으로 정부에서 허가가 되어 등장한 것이 언론재벌에 의한 방송사였다. 그래서 큰 신문 3사와 경제신문, 통신사, 그리고 연예기획사를 중심으로 종편시장에 뛰어들었고, 종이에서 줄로 도약했다. 지상(紙上)에서 케이블로, 글자에서 그림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는 이야기다.

종편채널에 대해 걱정도 많았다. 지상에 머물면 됐지 굳이 방송까지 장악해야 하느냐는 우려였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정말로 공영방송, 교육방송, 민영방송, 지역방송, 유선방송, 그리고 위성방송까지 인정하는 종합편성(?)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종편의 등장과 더불어 흐뭇한 것은 오히려 이것이다. 종편을 통해 참으로 많은 무명배우가 얼굴을 비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로 돌아가는 `응답하라' 시리즈도 있고, 만화를 드라마화한 `미생' 같은 것도 있었는데, 전혀 못 보던(배우인지도 모르겠는) 배우들이 열연을 하고 있었다. 무명배우들이 종편의 드라마를 통해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연극계를 중심으로 한류가 되살아날 가능성을 엿보여 주는 것이었다. 종편이 배부른 정객보다 배고픈 배우를 먹여 살리길 바래본다. 모노드라마 `염장이 유씨'도 그렇고, 극단 `새벽'도 그렇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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