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문화재 아는 만큼 보인다
청주 문화재 아는 만큼 보인다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8.05.16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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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지철당간부터 충북도청 본관까지
과거 · 현재 공존하는 도심속 공간 산재
(왼쪽 위) 충북도청 본관, (아래) 압각수, (가운데) 용두사지 철당간, (오른쪽 위) 청주향교, (아래) 망선루
(왼쪽 위) 충북도청 본관, (아래) 압각수, (가운데) 용두사지 철당간, (오른쪽 위) 청주향교, (아래) 망선루

 

 청주 성안길을 걷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 머물다 가는 시민의 쉼터인 청주 중앙공원. 우거진 나무 사이로 역사가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심 공간 속에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에 등록된 청주지역 문화재를 소개한다.


# 용두사지철당간(국보 41호·청주시 남문로2가)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의 피해가 컸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고 명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됐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했다.



# 충북도청 본관(등록문화재 제55호·청주시 상당로 82)

1937년 건립된 이 건물은 충북도청으로 지어져 현재까지 충북지역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해온 역사적인 곳이다. 전체적으로 중앙의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이며, 현관의 포치는 단순한 사각 형태로 화강석 마감이고, 건물 전면은 당시에 유행했던 갈색 스크래치타일로 마감됐다.



# 청주 압각수(시도기념물 제5호·청주시 남문로2가)

압각수는 나이가 9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로 높이가 30m, 둘레가 8m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목은 이색을 비롯한 어진 신하 10여 명이 모함으로 청주 감옥에 갇혔다가 큰 홍수를 만났을 때 압각수에 올라가 화를 면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이들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라 하여 석방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 청주 망선루(시도유형문화재 제110호·청주시 상당로13번길)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관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이곳에 방을 써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7년(1461)에 수리하였고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고쳐서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1923년에 제일교회로 이건되었으며,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 청주향교(시도유형문화재 제39호·청주시 대성동)

조선시대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며, 지방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지방국립학교이다. 조선초에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9년(168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한 6동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서적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김금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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