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too, 그 경계에서(5)
Me too, 그 경계에서(5)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5.1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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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직사각형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남녀학생이 앉아 공부하던 시절, 몇 명의 남학생을 제외하고 모두 조신했다. 손이나 학용품이 그어놓은 금(線)을 넘어오면 짓궂은 남학생들은 은근슬쩍 학용품이나 손을 잡아당기며 내 것이라고 상대방에게 기세등등하게 고집을 피웠다. 운동장에서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뛰어들어 아이스케키하고 치마를 들쳐 올리고는 낄낄거리며 도망을 갔다. 여학생들은 얼떨결에 당한 황당함과 창피함에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했다. 간난과 자존심, 위신, 권위, 남존여비 사상 등 이데올로기적 행위가 공존하던 시대, 그들이 지금 50살을 넘어선 중년들이다.

30여 년 전의 일들이 툭툭 튀어나와 난처하게 하는 요즘, 어린 시절 여학생들이 황당했던 것처럼 그 시절의 남학생들이 지금 그 여학생들로부터 낭패를 보고 있다. “알고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 어린것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며 어른들은 사내아이들을 두둔했다. 사내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언짢아하는 것을 읽기는커녕 오히려 재미 삼아 놀이로 즐기고 있었다. 부모 세대로부터 받아온 여자들의 억압된 관습이 초래한 핵심감정의 표출이 어쩌면 오늘의 미투가 아닐까 싶다.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대부분 미투 이야기다. 어떤 중년 여성은 미투를 하려고 해도 고인이 되어 할 수 없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세대의 페이지를 넘긴다. 과거를 미투에 맞춰 `내 주위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가?'하고 뒤적거려 보니 학창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산골에 살던 친구 하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가다가 산소 옆에서 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공부를 꽤나 하던 친구였다. 그때 산에 나무하러 온 모자라는 이웃동네 남자가 낫을 들이대고 위협해 봉변을 당한 모양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한때 그 여학생은 반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 아픔을 극복하고 지금은 잘 살아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서 말 못 하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그때 가해자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새빨간 오리발을 내밀겠지.

지금 일어나는 “미투 운동”이 어쩌면 지난날 우리 언니, 누나, 고모, 할머니들의 한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사연 앞에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특히 임박해오는 지방 선거로 정치인들이 미투로 많이 거론되고 있는 시점에 눈을 부라리며 상대 후보의 지나치리만큼 약점이나 흠집을 내며 누명을 씌우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특히 남녀관계는 조물주도 못 말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만큼 미투의 그 경계는 분명해야 한다. 권력이나 무력으로 약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행했다면 마땅히 죗값은 치러야 한다. 두 사람이 한때 서로 사랑했던 사이라면 미투를 건 사람의 행동이나 상황도 살펴봐야 한다. 미투가 수직적 관계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이기에 직책에 연연하지 말고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수평적 대책이 필요하다.

세상이 온통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다 보니 누가 판단하고 판정할지? 의문이다. 남존여비 사상과 권력과 부로 지배해온 우리의 풍토가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당한 일에 권력이나 떼거리로 몰아붙이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에 과민반응으로 상대를 공격하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 남자든 여자든 억울함이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으면 좋겠다.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꽃들이 뚝뚝 튀어나오는 계절처럼 하루도 조용한 날 없는 “미투”, 2018년 자연의 봄은 눈부시게 시작되었지만, 인간 세상은 씁쓸한 사연을 엎고서 여름을 건너려 한다. 눈부시도록 꽃불을 밝혀놓은 5월, 옆구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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