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그림자
스승의 그림자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8.05.1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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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김금란 부장(취재3팀)
김금란 부장(취재3팀)

 

요즘처럼 교사들을 탓하고 손가락질하는 시절도 없다.

교사들은 “무슨 일 하냐?”고 누가 물어볼까 봐 마음을 졸인다.

현재 법으로 제정된 법정 기념일은 48개다. 5월에만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 기념일이 8개 있다.

그런데 수많은 법정기념일 중 유독`스승의 날'만 각종 포상을 수여해도 당사자인 교사들은 어깨를 펴고 당당할 수가 없다.

교사에게 카네이션 한 송이 주는 것조차 법 조항을 따지며 뇌물과 선물을 구분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교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속물 그 이상도 아니다. 오죽하면 37년 전 제정된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고 현직 교사가 청와대 국민청원에 글을 올렸을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때가 있었다.

스승과 그의 가르침을 평생 따른 제자도 있었다.

조선 최고의 석학인 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모습이 그렇다.

다산 선생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기간은 1801년에서 1818년까지 18년이다.

유배를 온 정약용은 당시 머물던 동문 밖 주막집에 작은 서당을 열었고 그곳에서 15세 소년 황상을 만났다.

시골 아전의 아들인 황상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다산 정약용의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평생 공부에 매진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스승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초서와 시 짓기 등의 공부를 놓지 않았고, 노년에는 `일속산방(一粟山房`좁쌀 한 톨만 한 작은 집)'을 지어 오직 공부에만 몰두했다. 모두가 출세를 위해 공부할 때,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조용한 곳에서 숨어사는 유인(幽人)의 삶을 살았다.

다산은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스승에 대해 황상은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님께서는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면서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라고 늘 말씀하시곤 했네.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다네”라고 말했다.

황상은 스승이 죽은 뒤에도 스승의 묘를 찾아 강진에서 경기도 남양주까지 한겨울에 발을 싸매고 천릿길을 오갔을 만큼 스승의 그림자를 따랐다.

지금도 일선 학교에서는 제자를 걱정하고 마음 졸이는 수많은 교사들이 교단을 지키고 있다.

한벌초에서 근무했던 이상성 선생은 여든을 넘긴 지금도 수십 년 전 코흘리개 제자들이 졸업할 때 적은 장래희망 종이를 고이 간직했다가 만나는 제자들에게 건네주고 있다.

청주 현도중학교 김명철 교장은 금천고 재직 시 가르쳤던 제자가 스승의 뜻을 받들어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해병대에 입대한 뒤 훈련과정 중 앓게 된 폐렴으로 20004년 사망하자 매년 현충일이 되면 홀연히 떠난 제자에게 술 한잔 부어주기 위해 14년째 대전현충원을 찾고 있다.

현직 모 교장은 어려운 가정의 학생을 방학 기간 집에 데려다 하숙을 시키며 공부를 봐주기도 하고 동료와 하숙 릴레이 운동을 전개하자고 앞장서고 있다.

`학생은 있지만 제자는 없고 교사는 있지만 스승은 없다'고 흔히들 말한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거울이다. 우리 사회가 스승과 제자가 아닌 학생과 교사로 선을 긋게 만든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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