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의 관조
늦봄의 관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05.1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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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사람들은 살면서 어느 철 무슨 광경을 보고 세월의 흐름을 가장 잘 느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은 계절이 바뀔 때, 그것도 단기간 내에 감각적으로 뚜렷한 변화를 느낄 수 있을 때, 눈에 띄고 귀에 들리는 사물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느끼는 경향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워낙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강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는 봄이 가는 아쉬움과 섞이어 순식간에 상황이 바뀐다. 이런 의미에서 늦봄의 풍광은 사람들 눈에 가장 뚜렷이 들어오는 시계인 셈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청한당(淸閑堂)이 본 늦봄 시계는 어떻게 돌고 있었을까?


늦봄 뒤뜰에 앉아서(晩春坐後庭一首)

白雲初起轉多姿(백운초기전다자) 흰 구름 막 피어올라 온갖 자태 짓고
楊柳垂垂日影遲(양류수수일영지) 휘늘어진 버드나무에 저녁 햇살이 더디다.
屋角杏花明似雪(옥각행화명사설) 처마 끝 살구꽃은 흰 눈처럼 환한데
鶯兒聲裏坐題詩(앵아성리좌제시) 꾀꼬리 소리 들으며 시를 짓는다.

시인은 늦봄 어느 날 집의 뒤뜰에 앉아 있었다. 이 날만 특별하게 나온 것이 아니고 평소에도 자주 나와 있던 그 뒤뜰이었다. 그런데 이날따라 주변 풍광이 뚜렷하게 보이고 들리고 하였다. 시인이 들어서자 맨 먼저 나타난 것은 하늘의 구름이었다. 어디선가 숨어서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흰 구름은 시인이 뒤뜰에 나타나자 깜짝 등장하였다. 그리고는 준비된 연기를 능숙한 배우처럼 펼쳐보였다. 이런저런 모습으로 바꾸어 가며 자태를 뽐낸 것이다. 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구름의 모습이었다. 흰 구름이야 안 보이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지만, 뒤뜰에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터줏대감이 있었으니, 버드나무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버드나무는 그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가지가 늘어질 대로 늘어져 그 그림자가 느릿느릿 땅 위에서 출렁거렸으니, 이는 분명 봄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름의 정취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여름이 왔음을 직감한 시인의 눈은 처마 끝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살구나무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던 터였다. 시인의 예상은 적중했다. 봄이 감을 알리는 살구꽃이 마치 눈처럼 환하게 피어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여름 풍광에 푹 빠진 채 꾀꼬리 소리를 들으며 시를 짓는 시인의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봄이 왔나 했더니 봄은 이미 떠나고 있었다. 갑작스런 여름 풍광에 세월의 빠름을 느낄 수 있지만, 이는 결코 애상할 일이 아니다. 자연의 변화를 실감 나게 느낀다는 것은 인생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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