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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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재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5.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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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임성재 칼럼니스트
임성재 칼럼니스트

 

하모니카 삼매경에 빠져있다. 하모니카는 나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악기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모께서 입학선물로 일제 `톰보' 하모니카를 사주셨는데 그걸 불면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악기를 배우고자하는 열망이 있었다. 대학시절에는 콘트라베이스에 심취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클라리넷과 기타를 배웠지만 중도에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나이 들면서 악기를 하나 배워야지 했는데 하모니카가 떠올랐다. 하모니카는 들고 다니기 간편하고, 소리가 크지 않아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아무데서나 불 수 있기에 그 어떤 악기 보다 탁월한 선택 같았다.

평생교육원에 등록하여 주먹구구식으로 혼자 불던 하모니카를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하모니카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시간에 `All For The Love Of A Girl' 악보를 받는 순간 중학교 1학년 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학급 친구들의 얼굴을 익힐만할 무렵에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자그마한 키에 몸은 호리호리하고 얼굴은 백옥처럼 맑아서 척 보기에도 귀공자 같았다. 새까만 얼굴에 여드름이 빠글대던 내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일본에서 살다가 왔다는 선생님의 소개가 있었다. 자기소개를 마치고 빈자리로 들어가려는 아이를 향해 노래하라는 아우성이 쏟아졌다.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아이에게 보내는 질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결국 선생님도 노래하도록 허락하셨다. 그 아이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교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웰 투데이~ 아임 소 워리'로 시작하는 `All For The Love Of A Girl(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간혹 라디오에서 나오는 팝송이라는 것을 들어보긴 했지만 누군가가 직접 우리 앞에서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더구나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온 꼬마가 팝송을 영어로 부르다니. 노래가 끝날 때까지 교실은 정적에 빠져 버렸다. 우리 반 아이들의 동경어린 시선을 받으며 자리로 들어오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피어올랐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친구에게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도 흔쾌히 가르쳐주겠다고 나서서 내 생에 처음으로 팝송을 배우게 되었다. 요즈음 같으면 쉽게 녹음하고 재생하며 노래를 배우겠지만 그땐 막무가내 외우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영어를 배우지 못했던 때라 친구가 영어로 노래를 부르면 한글로 받아써서 가사와 멜로디를 함께 외우는 일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드디어 나도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이 노래는 내 평생의 애창곡이 되었다.

노래를 배우면서 그 친구와 친해졌다. 그 친구의 집에 자주 놀러 다녔는데 그의 집에는 난생 처음 보는 물건들이 무척 많았다. 그중에서도 그 친구가 연주하는 가녀린 바이올린 소리는 내 영혼을 감동시켰다. 연주를 잘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소리의 깊은 울림 속에 빠져 든 것만은 분명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반이 갈라졌던 그 친구는 다시 이사를 갔고, 그 이후로는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부르거나 그 음악이 흘러나오면 자연스럽게 그 친구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그가 거침없이 노래하는 모습을 동경하고 무작정 따라 부르면서 배웠던 그 노래는 내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한때는 팝 음악에 심취하고, 클래식을 좋아하며 이해하게 된 나의 음악적 정서는 그때부터 움트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연록 빛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의 아침 `나를 두고 떠나버린 한 소녀를 그리워하는 한 남자의 사랑의 마음'을 담은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하모니카로 불면서 과거의 그 시절로 떠나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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