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기나무 꽃
박태기나무 꽃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8.05.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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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안희자 수필가

 

산책로 비탈진 곳에 박태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꽃대도 없이 나무 밑동에서부터 진분홍빛 꽃을 몽글몽글 달았다. 박태기나무에 잘잘한 꽃이 소복이 박히는 봄이면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상 뜨신 후 삼십여 년을 홀로 사셨다. 혼자 조석으로 끼니 해결하기가 녹록지 않을 텐데도 일을 놓지 않으셨다. 힘에 부친다고 자식들이 말려도 번번이 도리질하곤 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한사코 고향집을 지키셨다. 고향집 울안에 박태기나무가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볼 수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꽃은 벚꽃이나 목련처럼 우아하지도 않으며 꽃봉오리가 크고 탐스럽지도 않다. 화려한 봄꽃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난 뒤에 피는 수수한 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해마다 봄이면 그 꽃을 기다리며 애지중지하셨다.

박태기나무에 분홍 꽃이 조붓조붓 피던 어느 봄날이었다. 갑자기 머리 위로 검은 물체가 윙윙거리며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요란한 소리에 놀란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디선가 날아온 수만 마리의 벌떼들이 붉은 꽃에 새까맣게 달라붙었다. 어린 나이에 처음 보는 낯선 풍경, 순식간에 꽃나무는 이내 벌떼 밭이 되었다. 겁에 질린 나는 일하시는 아버지를 다급하게 불렀다. 아버지는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얘야, 좋은 징조로구나. 저 꽃이 밥알을 닮아 밥티나무라고도 하지. 운 좋게도 벌떼 밭이 되었으니 밥은 굶지 않을 거 같구나.”

어쩌면 박태기나무는 아버지께 부(富)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그 시절 아버지가 꿈꾸던 삶은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도맡았으니 쌀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밤낮없이 일하셨고 열정만큼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해마다 봄이면 꽃이 많든 적든 박태기나무를 향한 아버지 마음은 변함없었다. 꽃을 보고 밥을 떠올린 아버지. 자식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이고 싶은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었으리.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밥으로 이어졌다.

몇 해 전, 박태기나무 꽃이 피는 오월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려고 미리 전화한 뒤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을 장만해서 시골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무쇠 솥에 밥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와 밥을 얹어 나에게 차려주었다. “식기 전에 어서 먹거라.” 아버지는 금방 드셨다며 자리를 떴다. 나는 아버지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코끝이 찡했다. 순간 목이 메 눈물을 삼키며 몇 수저 밥을 떠 넣었다. 그러나 더 이상 밥을 넘길 수 없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아버지가 드시다 남긴 빵 한 조각이 덩그러니 쟁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따끈한 밥은 사랑이다. 지금도 팔순의 아버지가 나를 위해 차려준 그 따뜻한 밥이 내 가슴속에 훈훈하게 식지 않고 남아있다.

예전엔 내게 박태기나무 꽃은 한철에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귀한 꽃, 숭고한 사랑의 꽃이며 내 아버지의 영혼의 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떠나셨지만 내 가슴속에 피는 박태기나무 꽃은 영원히 지지 않을 것이다. 바람결에 꽃잎이 밥알처럼 흩어진다. 오월이 아프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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