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소확행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8.05.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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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휙 지나려던 길이다. 외면하려 질끈 눈을 감아보아도 나에게 일제히 보내는 꽃들의 유혹은 그치질 않고 있다. 이 황홀한 꼬임에 빠지지 않을 독한 이가 있으랴. 끔뻑 넘어간다. 나의 감성에도 분홍물이 든다. 세월을 역류시킨 꽃 같은 소녀는 웃음이 헤프던 시절의 추억을 꽃밭에 휘휘 풀어놓고 있다. 이 얼마 만의 싱그러운 일탈인가.

“차각차각”소리에 꿈에서 깨어난다. 가위질 소리에 황급히 중년의 여인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가지를 쳐내며 꽃도 함께 따고 있다. 그 예쁜 것들을 잔인하게 무슨 짓이냐며 말리고 싶다. 업(業)인 그들에겐 이런 내가 미친 짓이다. 과실을 튼실하게 키우려면 꼭 해주어야 하는 작업이기에 말이다.

꽃이 잘려진 채 땅에 나뒹굴고 있다. 웃고 있는 모습이 예뻐서 더 처절해 보인다. 그 웃음도 잠시일 뿐, 햇빛은 오래지 않아 갈잎처럼 말려버릴 것이다. 꽃의 잔인한 나락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서둘러 복숭아과수원을 빠져나온다. 농막을 가는 길에 외도하느라 그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었다.

수현재는 우리 가족 셋의 이름 한자씩을 따서 지은 농막 이름이다. 농막은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의 자잘한 일은 즐거운 노동이 된다. 고추 10포기, 가지 5모, 고구마 300포기를 심으면서 나는 이미 부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찬거리의 빈 바구니를 채울 어여쁜 것들이다.

주위의 나무들이 하루하루 달라지더니 제법 신록이 되었다. 초록의 잎들이 가꾼 숲 속의 산장이다. 귤나무에서 여인의 향수가 향기로 전해질 때 기분이 좋아진다. 똘망이란 이름의 개와 냥이로 불리는 고양이인 식솔들도 다 사랑스럽다. 이곳에서 나는 마음을 충전한다.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어서인지 자잘한 일들이 잔잔한 감동으로 온다.

인터넷에서 “소확행”이란 생소한 단어를 알게 되었다. 무라카미하루키가 수필집인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으로 소개한 신조어이다. 소소하지만 현실 속에 또렷한 행복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막 구운 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의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소확행”은 모두에게 공존하는 공기 같다. 숨을 쉬면서도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이치인 셈이다. 당연한 것들을 감사하는 데서 오는 건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늘 있는 일이라서 무심코 지나치기가 쉽다. 굳이 거창하지 않아도 작은 데서 오는 기쁨이지 않을까. 아름다운 꽃을 보고 머금은 미소. 비 오는 날에 미치도록 좋은 커피 향. 어질러 있던 책상을 잘 정리한 뒤에 흐뭇해져 오는 느낌일 듯하다.

나흘 전에 씨를 뿌린 채마밭을 둘러보다가 흙속에 박힌 초록의 알갱이들이 눈에 띈다. 쪼그려 앉아 가만히 살펴보니 싹이 고개를 들추고 있다. 새싹엔 사투가 내 눈에는 귀엽다.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들여다보아서야 보이는 새싹. 이렇듯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일상의 여유를 나는 “소확행”이라고 말한다.

이런 행복은 내 안이 충만해져 있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혜안이다. 이건 순수한 사람만이 깨닫는 득도다. 내가 평생토록 닦아야 할 도(道)이다. 이는 도통하지 못할 무한의 환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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