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다
꽃 피다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8.05.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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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박명애 수필가

 

늦봄. 물이 들어오는 바다는 서늘하다. 파도가 발끝을 적시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밀려든 물안개는 순식간에 풍경을 흐릿하게 지워간다.

바람을 안고 뭍과 바다의 경계를 걸어가는 엄마의 빨간색 점퍼가 팽팽하게 부푼다. 여린 꽃봉오리가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 같다. 든든한 엄마지만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늘 가슴 먹먹하다. 달려가 팔짱을 끼는 막내의 원피스가 이파리처럼 팔랑거린다. 엄마 모시고 점심 먹자던 가벼운 번개는 둘째의 깜짝 이벤트 덕에 변경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바닷가 걷기로. 하지만 예기치 못한 짙은 안개 때문에 짧은 산책으로 일정을 갈무리한다.

아쉬움 달래며 돌아오는 길. 풀빛 짙었던 들녘은 바다로부터 풀려나온 안개에 몽롱하게 젖어 있다. 자동차들이 느리게 흐르는 동안 동생이 음반을 넣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친근한 트로트 선율에 녹아든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소하면서도 묘한 중독성이 있다. 꽃이란 단어가 반복될 때마다 한 점 꽃 같던 엄마의 뒷모습이 지나간다. 노래가 흐르는 내내 엄마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리듬을 탄다.

안개를 벗어나자 바람이 싱그럽다. 길가에 이팝꽃 눈부신 걸 보니 어느새 입하가 가까운 모양이다. 하얀 이팝꽃 지나는 차창으로 엄마 블라우스 노란 꽃무늬가 비쳐 보인다. 나무둥치와 겹쳐져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 숨바꼭질한다. 엄마에게 꽃은 어떤 의미일까.

문득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부드러운 권력'이 떠오른다. 여성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한 작품들은 잃어버리거나 무시된 여성 내면에 존재하는 힘을 보여준다. 그 중 조영주의 영상작품들 `그랜드 큐티'와 `꽃가라 로맨스'는 평범한 중년 여성들이 실제 거주공간을 배경으로 멋진 춤을 보여준다. 같은듯하나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꽃치마는 일상에 가려진 여성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아줌마라는 명칭에 갇힌 삶에서 불려나온 그녀들은 유쾌하고 발랄하다. 어쩌면 그녀들이 입은 꽃무늬, 엄마가 좋아하시는 꽃무늬는 나다움의 최소한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꽃은 보편적으로 아름다움을 상징하지만 수많은 의미를 파생해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삶과 함께 해온 꽃은 지구 상에 생명을 잉태하고 존속하게 하는 위대한 존재다. 어머니들의 삶도 그렇지 싶다. 처지도 다르고 개인의 역량도 다르지만 꽃이 생태적 환경을 극복하고 씨앗을 품듯 어머니들도 그리 주어진 삶을 껴안고 사랑으로 보듬는다. 그리고 자기만의 빛깔과 향기를 가진 독립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따금 외출할 때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신선한 `낯섦' 혹은 `뜻밖'은 엄마가 아닌 `나'의 증명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엔 꽃무늬로 넷이 단체복을 맞춰 입고 나오자는 막내의 제안에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다. `엄마도 딸도 아닌 여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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