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 정인영<사진가>
  • 승인 2018.05.03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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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정인영

`사진은 즉각적 행위이고 데생은 명상이다'. 불멸의 고전으로 알려진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193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40년 가까이 인간의 삶을 `결정적 순간'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사진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매혹시켰고,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찬사는 새너즘의 터치로서 카메라를 다루는 잔인한 관찰자이면서 휴머니스트인가 하면 탐미주의자, 비극적 시각의 전달자, 서정시인이며 낭만파, 현실주의자적인 사진예술가였다. 그는 또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사진을 화보, 잡지에 게재했다.

1930년대 초 그의 사진을 `결정적 순간'의 미학으로 부르게 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사진의 내용이 의미심장해야 하며, 엄격한 구성 속에 담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눈 깜짝할 사이에, 어떤 상황의 가장 긴장된 때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대상의 움직임 속에서 생명이 들어 있는 정확하고 기하학적인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90년대 들어서는 아예 자신이 탐방사진가였던 적이 없으며, 탐방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고 격렬하게 말하기도 했다. 수많은 잡지 속에 게재된 자신의 사진들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언론과는 관계도 없으며 단지 개인 취향에 젖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카메라를 `순간적으로 그려내는 단순한 도구'라고 말했다. 보고, 구성하고, 셔터를 누르는 것 등이 단지 한꺼번에 되는 중요함이며, 그 결과 나오는 것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작업을 보노라면 몇몇 태생적 요소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당시 직물 산업계에서 큰 재산을 모은 브루주아 집안 출신이자 맏아들인 그는 아버지의 사업에 관심이 없었고, 1930년대 유럽이 파시스트의 위협에 처해 있을 때 AEAR, 즉 혁명적 문인예술가협회에 들어갔다. 1936년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영화 `인생은 우리 것'의 감독 장 르누아르의 조수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가도, 운동가도 아니었다. 그의 사진들이 그 자신의 성품을 잘 품어낸 사회적 차원의 지속적인 사진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부친의 가업(家業) 잇기를 거부한 그는 잡지들에 사진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며, 1936년에서 30년대 말까지 공산당일간지 스 수아와 자매지 르가르에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였고, 프랑스 저항운동인 레지스탕스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다가 후에 전쟁터와 중국 등의 취재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세계 사회에서 상당수의 사건을 목격하여 완결된 사진으로 만들어냈으며 언제나 악착같이 찍었고, 35㎜ 카메라로의 가능성을 `최대한 이루어낸 가히 사진가의 달인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세계 역사적 경지에 올랐다.

그는 어떤 사건을 예상하면 항상 찍고자 하는 대상에 가장 효과적이며 틀림없이 사진으로 남기는 데 집중하였으며 의식적으로 찍고, 필름을 정확하게 현상하여 그 사진에 제목과 설명을 적는데 한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오래된 그의 사진작품 `결정적 순간'이 1952년 출간돼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음에 비추어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세계 사진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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