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주 (梨花酒)
이화주 (梨花酒)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8.05.0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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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막걸리 선물을 받았다. 예전의 막걸리 병과는 다르다. 매끈한 몸매가 도시여자처럼 세련되었다. 술에 대한 기억이 쓰기만 한데도 주는 이의 마음이 헤아려져 기쁘게 받아 들었다. 주류회사를 경영하는 문우의 선물이다.

종이상자 안에는 여섯 병이 각기 다른 이름을 달고 얌전하게 서 있었다. 간택을 기다리는 술병을 요리조리 살펴보다 조 껍데기 술을 집어들었다. 저녁밥상을 앞에 두고 건강을 이유로 술을 끊은 가장과 아이들 앞에서 한 컵을 따라 천천히 마셨다.

금방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숨이 가빴다. 이튿날은 적응되는지 조금 덜 취하고 사흘째가 되니 술 맛이 달달하다. 취기도 덜 올라 견딜만한데 식구들의 염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저녁마다 한 병도 아니고 한 컵만 마시는데도 혹여 말 못할 일이 생겼나 묻고 알코올중독을 내세워 위협까지 한다. 술이라면 입에 대지도 않는 사람이 저녁마다 마시는 게 분명 이유가 있다고 단정 짓는다.

광목 앞치마를 두른 할머니가 시루에 찐 지에밥을 돗자리에 펴느라 엎드리면 등에 내리던 햇살과 은비녀를 꽃은 뒷머리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적당히 물기를 말리는 동안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워야 몰래 먹을 수 있었던 찹쌀고두밥은 일 년에 두 번 모심을 때와 추수 때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지에밥에 누룩과 물을 혼합해 넣은 단지를 광에 드려놓고 발효가 되면 용수에 고이는 맑은 술은 제사에 썼다. 남은 것을 물 섞어 거르는 날이면 탁배기 한 잔 마시자며 동네 아저씨들의 대문출입이 잦아 잔칫집처럼 법석거렸다. 그날은 술을 드시지 못하는 아버지도 한 잔술에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한국의 전통술에 이름도 여러 가지다. 막 걸러낸 술이라고 막걸리라 하고 색깔이 탁하여 탁배기, 탁주, 농사지을 때 먹는 술이라 농주라 불렀고 찌꺼기가 남는 술이라고 재주(滓酒), 신맛을 없애고자 재를 섞는다고 회주(灰酒), 흰색이라 백주라 불렀다지만 나는 고려 때의 이화주(梨花酒)란 이름이 제일 맘에 든다.

배꽃 필 무렵 담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지금은 아무 때나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사라진 지 오래인데 얼마 전 배꽃 만발하자 불현듯 이화주가 떠올랐다. 전통 이화주와는 맛도 다를 것이나 감성에 젖어 막걸리 병을 따기 시작한 것이다.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갓 나온 파전에 막걸리를 걸치는 것만큼이나 운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만 그래도 달빛 아래 하얀 배꽃을 보며 마시는 이화주만 하랴. 내가 저녁밥상에 낮에 본 배꽃을 끌어다 놓고 산등성이에 걸친 환한 달빛도 창가에 앉히고 이화주를 마신다는 걸 식구들은 상상이나 할까. 배꽃 지고 남은 술은 농주로 바꿨다. 작은 텃밭을 점령하는 풀들과 전쟁을 하려면 핑곗거리로 안성맞춤이다.

식구들 눈치 보느라 여섯 병을 흔들어 따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여자가 막걸리 병을 흔들어 마개를 따는 것만 봐도 못마땅해하던 나였는데 엄마의 변한 모습을 아이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본다. 아무래도 막걸리 애호가가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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