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달맞이꽃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8.05.01 2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달맞이꽃이 피었다-.”

꽃이 필 때마다 연연히 되새김질해 온 이야기를 남편이 선수치는 것이다. 노란 꽃이 하나 둘 보인다 싶더니 몇 년이 지나며 군락을 이루었다. 멀대같이 자란 대궁에 노란 꽃잎이 다닥다닥 달렸다. 밤을 꼬박 새우고는 졸음에 겨워 흐느적거린다.

꽃말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그리움이고 사랑이다. 오직 달을 향한 요정의 눈물겨운 사랑이며, 돌아올 수 없는 아들을 향한 내 어머니의 애절한 그리움이다.

꽃말을 생각하며 노란 꽃잎을 똑똑 땄다. 휑하니 남은 대궁의 절망스러움에 미안함도 잠시, 찻잔에 띄우면 거기에도 오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빠는 갔어도 늘 어디나 있었다. 진수성찬 앞에도, 한없이 좋은 날에도, 햇살이 눈부신 날, 달이 뜨는 밤에도 어머니는 가슴에 묻어 둔 오빠를 불러내었다. 달이 뜨고 지고, 달맞이꽃이 피고 지기를 수십 해 그리움도 옅어진 뒤에 잔잔한 회상이다.

도회지로 유학 간 오빠가 모처럼 돌아온 날, 산골 마당에 달빛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네온 등에 타버린 하얀 얼굴의 산골 머슴애는 천연덕스러운 달빛에 감격했다. 그달을 찬양이라도 하려는 듯 기타를 들고 들마루에 앉았을 때, 반듯한 이목구비가 달빛에 감겨 하얗게 빛났다.

‘달맞이꽃’노래는 오빠에게 배웠었다. 어설픈 두 목소리가 밤을 흔들면 달빛은 더욱 교교하게 빛났다. 그 밤 어느 들녘에서도 달맞이꽃이 노란 하품으로 일어났을 거다. 새벽이면 돌아갈 달을 껴안고 사랑에 겨운 밤에 오빠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삶이 버거웠을까. 일상이 꿈이 되어버린 삶, 그 무게에 짓눌려 밤사이 멎어 버린 청년의 심장은 돌아올 줄 몰랐다. 코흘리개 적부터 오르내리던 뒷산 초입에 묻었다. 눈 구경하기 힘든 아랫녘 산골에 청승맞은 눈발이 흩날렸다. 옆집 아지매는 아까운 청춘이 갔으니 겨울 하늘이 우는 거라고 했다. 올려다본 하늘이 온통 잿빛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묻힌 뒷산을 올려다볼 수 없다며 고향을 등지셨다.

어머니의 세월 안에 소요하는 웅장한 거목이더니, 달빛처럼 빛나다 지고 말았다. 다시 올 리 없는 오빠를 향한 덧없는 기다림으로 어머니는 달맞이꽃이 되었다.

그리움이 너무 진해지면 그 주체를 찾아 떠나보든지 내려놓아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어머니는 가슴에 오빠를 묻은 채 떠나셨고 세월은 내가 보내지 못한 오빠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갑자기 고향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간의 세월은 생무덤이 앉은 따비밭을 숲으로 만들어 놓았다. 살았으면 허연 머리를 하고도 씨익 웃으며 반겨줄 오빠가 없다. 묻고 돌아선 뒤 자그마치 17년 만에 가 본 고향이었다.

어머니의 그리움을 어찌 달맞이꽃의 그것에 비교하랴만, 꽃이 필 무렵이면 흐드러진 꽃밭에서 어머니의 애절한 눈빛을 찾아내곤 한다.

고향집에서 보았던 것을 다 심어 놓은 뜰에 달이 뜬다. 달빛 언저리에 달맞이꽃도 따라 피는데 어느새 고향을 만들고 있었다. 나의 연가는 세월의 간격만큼 바래지고 ‘달맞이꽃’도 흘러간 노래가 되었다.

밤으로 피고 낮으로 지는 것이 어찌 달맞이꽃만이랴. 울 어머니, 저승 옷 차려입고 날아오른 천상에서 기어코 달보다도 빛나던 아들과 눈물의 해후를 하셨으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