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정밭
묵정밭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8.04.30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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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따닥따닥 흙바닥으로 떨어진 빗방울이 다시 흙탕물을 만들어 신발에 누렇게 튀어 오르는 갓길에 서 있다. 산자락엔 먹구름이 짙게 내려앉아 어두컴컴하고, 저수지에 내리꽂는 장대비는 물 위에 뿌연 물안개를 만들어 그간의 잊고 있던 희미한 기억의 끄트머리를 잡는 듯 하얗게 피어올라 달뜨게 한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라고 했는데 곡우가 지난 이틀 만에 진종일 비가 내리는 걸 보면 올해는 풍년이다. 

한때 출조를 위해 찾던 저수지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 한참을 질퍽한 길을 추적추적 걷다 보니 저수지 맨 끝 묵정밭이다. 봄비로 밭뙈기 군데군데 자작거리는 물웅덩이는 이랑처럼 골을 만들고 밭 뚝 엔 온갖 잡초가 앞다투어 올라오고 있었다. 될성부른 싹이 없는 묵정밭에 겨우내 칼바람에 할퀴고 할퀸 묵은 갈대가 축 처져 있고 온갖 잡풀이 무수한데 그 중 망초가 지천이다.

묵정밭 끝자락에 구불구불한 가지가 길게 뻗어 저수지를 끌어안듯 서 있는 범상치 않은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계절 따라 완연히 다르게 다가오는 느티나무, 무성한 이파리 다 떨 군 잔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하늘빛이 매력인 이곳, 그래서 봄이 삐쭉 얼굴 내밀기 시작하면 출조할 때 찾는 저수지다. 명분만 낚시지 관심사는 주변경관인지라 낚싯대만 드리워놓고 묵정밭에서 쑥과 망초나물 채취에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생전 어머니도 봄철 풀데기는 독이 없다며 마뜩한 망초를 뜯어 한 솥 가득 삶아 뒤적뒤적 바싹 말린 묵나물은 겨울양식으로 서까래 대롱대롱 매달아 놓으셨다.

봄철이면 찻잔에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활짝 낚싯대를 펴놓고 느티나무 근처를 배회했다. 혹여나 입질이 오기라도 하면 신경 끝을 세우고 바라보다 밑밥만 갈아줄 뿐 잡을 생각은 아예 없었다. 한갓지게 쑥도 뜯고 망초나물도 채취하면서 저수지주변을 배회하며 수다를 떨고 느티나무 그늘 아래 정물처럼 앉아 솔바람에 일렁이는 물비늘 속에 봄을 만끽하는 것이 일과였다. 저녁나절이면 어쩌다 잡은 물고기는 모두 방생을 해 준다. 그저 하루쯤 쉬어가며 머물다 가는 곳이 아닌 소소한 일상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곳이었다.

느티나무 뒤 언덕배기에 능 못지않은 산소 봄날이면 유독 따사로운 봄볕으로 나른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잠시 춘곤증을 달래는 곳이다. 오랜만에 찾은 이곳, 위상을 자랑하던 느티나무에 변수가 생겼다. 묘 주변이 느티나무 그늘로 조상을 어둡게 만들어 햇빛을 드리고자 그랬을까. 밑동은 도끼로 찍혀 있고 상처가 난 가지는 아물지도 못하고 고사하여 있었다. 지난 추억을 송두리째 삼켜버리고 가지가 꺾여 반쪽만 애처롭게 살아 을씨년스럽게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흐릿한 날씨만큼 무겁게 마음도 내려앉는다. 세상은 누구를 위한 몫일까. 세월이 비켜간 듯 늘 변함이 없던 저수지도 문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걸까. 물 버들도 베어지고 인공조경과 새뜻하게 정비된 저수지는 세월의 흔적조차 밀어버렸다. 누군가 진정한 강태공은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는다 했는데 이젠 먼 추억으로 자리를 잡을 뿐 저수지도 묵정밭도 아무런 영혼이 없는 듯 허망할 뿐이다. 낯설다.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반듯하게 조경 석으로 가꾸어 마름군락도 겨우 가장자리에 왕따처럼 뭉그적거리는 저수지. 개나리, 망초 꽃도 가으내 일렁이던 갈꽃, 변화무상한 계절을 품었던 그 자리에 서서 수초처럼 끝없이 술회하다 희미하게 꺼져가는 기억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무거운 하늘빛만큼 빗방울이 무겁게 투덕거리며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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